파이어족, 그 이후에 관하여

by 김거인


‘파이어(FIRE movement)족’이라는 용어가 쓰이기 시작한지도 벌써 몇 년이 지난것 같다. 매스 미디어에서 꽤나 자주 등장했고 한동안 화제가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고정관념에 사로 잡힌 사회에 파란을 일으킨 그 단어는 처음 등장했을 때 만큼 임팩트 있게 다뤄지고 있지 않는 듯 하지만, 지금도 여러 사람의 마음에 은근히 불을 지피고 있는 것 같다. 나 또한 살면서 생각하지 못했던 개념이었기에 많은 영향을 받았고 결국 퇴사를 할 수 있는 용기를 준 여러 이유 중 하나로 꼽을 수 있겠다.


그동안은 돈이란 것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고 제대로 배운 적도 없었으며, 그저 일을 하는 대가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어쨌든 평생 주어진 일을 하며 사는 것이 정답이라고 여겨왔다. 그런데 경제적으로 자유로워지게 되면 그런 관념의 전제부터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이후 돈 공부에 혈안이 되었다. 그렇다고 큰 돈을 번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고 나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고, 조직 생활만을 유일한 선택지로 알고 있었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 단어는 내게 새로운 세상의 문을 활짝 열어주고 생각지도 못한 가능성에 대해 고려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고마운 개념인 것이다.


나의 경우 노후 대비까지 계획하고 퇴직한 것이 아니고, 일을 아예 안 할 생각도 아니었으니 엄밀히 말하면 파이어족은 아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현재 퇴직한 이후의 삶을 살고 있다는 점에서는 어느 정도 공통점이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내가 겪으며 생각하고 있는 것 중 파이어족이 되기 위해 준비하면 좋을 만한 것들을 몇 가지 추려 공유해보고자 한다.


하고 싶은 일이 분명히 있는 것이 좋겠다.

일을 그만두게 되면 사회적 단절감이 엄청나기에 막연하게 쉬면서 여행하며 유유자적하게 살고 싶다는 가벼운 마음이라면 조금 어려울 수 있을 것 같다. 혼자 남겨지더라도 나를 지탱할 수 있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즉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원동력이 될 만한 무언가가 필요한데, 그런 힘을 주는 것이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인 것 같다. 뭘 하고 싶은지 알기 위해서는 진짜 나를 대면하고 많은 대화를 나눠야 한다. 그 기간은 생각보다 길어서 적어도 1년 정도는 걸린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직장을 그만 두기 전에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미리 갖거나, 그만 둔 이후라도 자기 자신과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함을 고려해서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 좋겠다.

늘 계획적으로 생활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어 학창시절 방학 기간에도 규칙적인 생활을 했던 사람이 아니고서는 매일 갈곳이 없는 상황에서라면 늘어지기 쉽상이다. 나름의 규칙을 만들어 놓지 않으면 한 것도 없이 하루가 훌쩍 가버린다. 한 것 없이 지나가는 하루가 쌓이다보면 자신감도 하락하고 그에 따라 감정 기복도 생기게 되어 장기적으로 손해다. 규칙적인 생활, 즉 루틴이 있는 하루를 계획해서 보내게 되면 신체리듬도 챙길 수 있고 무엇보다 의미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단기 결과를 볼 수 있는 행위를 꾸준히 하는 것이 좋겠다.

남들이 봤을 때 우습게 여길 수 있는 것일 지라도 괜찮으니 어떤 것이든 단기간에 그 성과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을 해 볼 필요가 있다. 외부 자극 없는 시간이 지속되다 보면 뇌에 기억이 남지 않아 시간이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마음 놓고 쉴 작정이라 할지라도 이런 시간이 지속되다 보면 불안감이 쌓인다. ‘하는 것 없이 나이만 먹는구나!’ 하는 자괴감이 들기도 하고 미래에 대한 불안이 폭포수처럼 밀려오기 시작하면 마음 속 작은 연못에 흙탕물이 일어 엉망이 되어버린다. 그걸 가라앉히려면 꽤나 고생이고 말이다. 단기에 결과를 볼 수 있거나 실력이 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예를 들면, 악기 연습이나 게임이라도 좋다)을 하면서 작은 성공의 경험을 쌓는 것이 필요하다. 평소에 작은 성공이 주는 뿌듯함이라는 조약돌을 마음 속 연못에 하나 둘 던져놓고 있다 보면 미꾸라지 한 두 마리쯤 헤엄쳐도 흙탕물이 크게 일지 않는 진중한 마음이 될 수 있는 것 같다.


사회활동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이 좋겠다.

평소 인간관계의 폭이 두터운 사람이라면 괜찮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갑자기 직장생활을 접게 되면 사회관계도 함께 끊긴다. 친구들이 있다고 해도 직장을 다니고 있을 그들은 평일에 만나기 어렵고 또 각자 가정이 있으면 더욱 함께하기 힘들다. 뭔가를 배우거나 모임을 갖는 것 같은 활동을 통해 사회관계를 이어날 필요가 있다. 물론 나를 잘 알아주는 친구가 있는 것이 베스트지만, 내가 아직 사회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갖을 수 있는 것이 중요하므로 상대가 꼭 절친일 필요는 없다. 내가 어떤 활동을 함으로써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고 나 또한 영향을 받아 발전해 나갈 수 있는 건강한 거리감이 있는 관계라면 좋은 자극이 되는 것 같다. 어떤 형태로든 지속적인 사회활동을 하게 되면 그런 사람들과 만날 수 있게되므로 일부러 만들어서라도 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기분 전환이 되는 치트키를 여러 개 확보해 두는 것이 좋겠다.

앞서 얘기한 것들을 실행한다고 해도 매일 똑같은 일상이 계속되다보면 지루해지고 슬럼프가 오기 마련이다. 사실 이것은 직장을 다니든 다니지 않든 똑같다. 아니, 살아있는 한 쭉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럴 때 순간 기분을 전환시킬 수 있는 치트키를 리스트업 해두고 하나 둘 시도해보면 좋다. 기분이 심연의 바닥으로 떨어지기 전에 건져 올리면 회복도 빠르기 때문이다. 거창할 필요는 없고 노래를 부르거나 귀여운 강아지 동영상을 보는 것 같이 단시간에 기분을 환기시킬 수 있는 내가 좋아하는 것이면 된다. 다만 평소에 그런 것들을 생각해두고 있어야 우울감이 올라올 때 바로 행동할 수 있으므로 당장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다.


죽도록 하기 싫은 일에서 벗어나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은 누구나 바라는 일일 것이다. 경제적 자유를 성취하게 되면 그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어쩐지 파이어족에 대해 논할 때는 주객이 전도되어 돈을 벌기 위한 방법에만 열중하고 그래서 정작 내가 뭘 하고 싶은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듯한 인상이다. 물론 하고 싶은 것이란 개인차가 크고 다른 사람이 정의해 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지만, 사실 정말 하고 싶은 일이란 큰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막연하게 뭘 사고 뭘 먹고 하면 행복할 것 같지만 소비라는 행위로 채워질 수 있는 행복이란 너무나 얄팍해서 채워도 만족하기 어려운 것 같다.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나는 바닷물같이 점점 더 큰 자극을 요구하게 된다. 욕심이란 끝이 없으니까. 나는 당장 얼마간의 생활이 가능할 정도만 확보해도 일단 시작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번 시간 동안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하다보면 그것으로도 돈을 벌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공공연하게 떠들기엔 너무 무책임한 말일까? 내가 희망의 증거가 되겠으니 나를 믿고 따르라는 말을 하고 싶은건 아니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는 중이다.


어떤 이유로든 파이어족이 된 분이나 될 준비를 하고 계신 분이 있다면 내가 나의 선택을 존중하듯 그들의 선택을 존중하며, 세간의 고정관념을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실행에 옮긴 그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나는 작은 바람에도 세차게 흔들리는 한낱 중생에 불과하여 하루가 멀다하고 번뇌에 휩싸이지만, 세상 어딘가에서 나와 비슷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사람들이 있다는 보이지 않는 연대감이 내게 새로운 하루를 보낼 수 있는 힘을 준다. 그런 감사하는 마음과 함께 그들의 선택의 끝에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도하며 오늘 하루도 힘차게 시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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