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드 Jul 19. 2019

공허의 1/4

고통이 주는 삶의 공간은 견디기 힘든 공허다. 무엇으로도 채울 수없는 빈공간. 그것은 어느날 트라우마와 함께 삶의 한곳에 결핵의 공동처럼 한자리를 차지한다. 그리고 그것은 견디어낼 삶의 대체적 피안이 된다. 아픔으로 만들어진 상처의 흔적이 오히려 삶의 위안이 되는 역설적인 상황. 룹할하리사막, 사슴벌레 그리고 낙타수레는 그러한 공허가 만든 공동이다.


 공허의 1/4은 극심한 고통을 격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타자의 고통은 동감하지 못하면 그야말로 공허하다. 작가가 상상으로 만들어 놓은 허구일지라도 그 등장인물의 아픔을 동감하지 못하면 한낫 재미로 읽을 만한 이야기거리도 못된다. 허구는 읽는 사람의 내면에 아픈 흔적을 끌어내어야 읽히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공허의 1/4는 내게 삶의 내밀한 거울이 되기에 충분했다.


서른 몇살에 류머티스 관절염으로 206개의 모든 뼈가 녹아내리는 듯한 아픔을 지니고 살아가는 한 여자가 있다. 그녀는 회식자리에서도 다리를 구부리고 앉지를 못하는 등 일상생활에서 불편과 고통을 안고 살아간다. 뼈를 구성하고 지탱해주는 모든 마디들이 뒤틀리고 라텍스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그속에 물이 찬것같은 고통을 느낀다. 그러나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고통은 혼자서만 견뎌야하는 비밀이다. 그녀는 어느날 룹알하리 사막에 가면 그 내리쬐는 햇빛으로 온몸의 염증이 증발해버리고 아픔이 치유될 것으로 믿는다. 그녀에게 룹할하리 사막은 그녀의 삶을 구원해줄 시원이다. 그리고 엄마의 죽음을 안드로메다로 떠났다고 믿으며 엄마의 부재를 자폐적 삶으로 견디며 살아가는 한 아이가 있다. 엄마가 보낸 전령으로 믿는 사슴벌레를 한쪽 어깨에 얹고 언젠가 엄마를 만나기위해 안드로메다로 가기를 꿈꾼다. 그 아이는 엄마의 부재한 공간에 대하여 주변의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또 한사람 어릴적 아버지의 죽음으로 가정이 파탄나버린 순박한 청년이 있다. 그는 바보처럼 놀림을 당하기도하고 무시당하기도 하지만 묵묵히 수레를 낙타삼아 끌며 그 낙타와 대화하면서 외로움속에 살아간다. 세사람사회적으로 비교적 낮은 위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늘 혼자다. 자신들을 이해해주거나 아픔을 공감해주는 사람은 없다. 이해할 수 없는 그들을 주민들은 투명인간처럼 또는 외계인처럼 대한다.


극복할 수 없을만큼의  엄청난 트라우마는 살아가는 하루 조차 힘들게 한다. 트라우마로 내상을 입은 뇌와 영혼은 극심한 혼돈을 격고 삶의 구조를 변화시킨다. 의식주의 기본적인 신체적 시스템으로 부터 말하고 듣고 보고 느끼는 모든 감각을 마비시키며 살아가는 것 조차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 갑작스레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으로 생긴 부재의 공허는 세상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공간이며 진공상태의 먹먹함과도 같다. 오열과 통곡으로 울부짖어보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저 입만 벌리고 눈물만이 흐르는 정적의 계속이다.


동정과 동감하는 마음은 다르다. 동정은 대상을 동등한 위치에 두지 않음이며 동정의 대상을 통해 자신의 고통에 대 위안을 발견한다. 하지만 동감은 자신을 대상과 동일한 선상에 두고 같이 함께 아파하는 것이며 오롯이 그 아픔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래서 동감은 본질적으로 그 대상과의 내밀한 부분까지도 같은 감정을 공유하는 것이다.


타자의 아픔을 동감한다는 것은 타자를 위한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타자의 아픔에 나를 동일시할 수 있는 마음은 분명 사랑을 전제하는 것이라 믿는다. 슬픔을 당한 어떤 사람앞에서 그 슬픔이 내 가슴으로 고스란히 전해져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내릴때가 있다. 대화중이지만 내 목에 커다란 구슬이 걸린것처럼 목소리가 나오지않는다. 맨목으로 그사람에게 위로의 말을 하고 싶지만 그 어떤 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맨목에 눈물을 그렁하게 담은 채로 바라볼 수 밖에 없다. 힘들어 하는 사람을 보면 누구든 안아주고 싶어진다. 따뜻한 허그를 통해서 말은 하지 않만 상대의 슬픔이 고스란히 내게 전해지고 흐느끼는 잔잔한 어깨가 뜨거운 눈물로 흥건히 적셔진다. 그러면 내가 위로하는 맘이 진정으로 전해진다. 서로를 안고있는 동안은 상심과 위로의 맘이 알 수없는 끈으로 연결되어 끊임없이 위로하고 위로받고 있는 것이라 믿기때문이다.  


어느날 여자는 남자를 안아준다. 음식 쓰레기를 치우고 제데로 씻지 않아서 더러워진 그대로. 그리고 남자는 여자에게 고양이를 잡아서 아픔(류머티즘)을 치료하라고 한다. 또한 남자와 여자는 아이의 안드로메다행 우주선을 만들어 아이에게 선물한다. 이들은 세상에서 소외받고 소통하지 못하는 섬같은 존재들이지만 그들은 서로의 아픔을 알았을 때 서로 동감하며 같이 아파한다. 소설을 읽고 난뒤 히로카즈의 어느가족이 떠오른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가족이지만 그 어떤 가족보다도 가족안에서의 사랑을 공허의 1/4에서 느꼈다. 세사람은 비록 영화처럼 같이 살지는 않만 함께 사는 가족이 느끼지 못했던 깊은 소통을 통해 서로의 아픔을 동감할 수 있었다. 타자는 무관심으로 오히려 자유스럽게 놓아주지만 때로 가족은 가족이라는 틀안에 가두어두고 감정을 강요하고 가족이 느끼는 아픔에 대하여 오히려 견딜 수 없는 폭력을 가할 때가 많다. 이럴땐 오히려 가족안에서 이기보다는 아이처럼 밖이 더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동감은 목적이 없다. 동감은 보상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내것을 내어 주어야하는 희생이다. 그래서 내 앞에 있는 타자의 슬픔을 내 감각의 기억으로 같이 아파하는 것이다. 그것은 거리의 길고 짧음에 구애받지 않는다. 먼 곳 이국땅 피부색이 다른 아프리카의 굶주린 아이들이나 내전으로 피폐한 삶을 살아가는 중동 어느지역의 사람들, 전쟁으로 팔다리가 잘린채로 고통스럽게 울부짓는 병사들, 아이를 잃고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세월호의 부모들, 사회가 다변화되고 빈부격차가 벌어지면서 끼니를 걱정하며 살아가야하는 극빈층 아이들의 눈망울. 그들 모두를 안아줄수는 없지만 마음으로 안아주는 따뜻한 동감의 마음이 척박하고 메마르게 살아가지만 이 사회 대부분의 누구에게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책읽기 타자로부터의 자유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