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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드 Jul 26. 2019

치유하는 걷기의 인문학

걷기 예찬-다비드 르 브르통

겨우내 두꺼운 옷 속에서 표백시킨 것 같은 하얀 살갗 위로 따가운 봄햇살이 뾰족한 바늘이 되어 꽂힌다. 시야를 막는 장애물 하나 없이 탁 트인 벌판은 듬성듬성 걸려있는 구름들과 함께 한가로운 그림을 만들고 있었다. 나는 그날 에티엔 드 라보에시의 150페이지 남짓한 책 "자발적 복종"과 함께 집을 나섰다. 대구에서 상주 가는 시외버스 안에서 단숨에 읽어버린 400년 된 뜨거운 외침은 온통 마음을 휘둘러 놓았고 그로 인해 혼란스럽던 머릿속은 봄볕의 태양과 함께 활활 타오를 것만 같았다. 회룡포에서 용궁까지는 걸어서 2시간 정도. 그 길을 걷기로 마음먹었던 단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바람기 없는 봄날의 햇살은 걷기에 다소 부담스럽다. 그러나 7킬로 남짓 되는 그 길을 걸으면서 귓속을 울리고 가슴을 몰아치는 라보에시의 뜨거운 육성과 함께 하고 싶었다. 약 2시간 정도 걸리는 그 길이 내 마음속 대단한 변혁의 길이 될 것만 같았다.


그리 길지 않은 거리와 짧은 시간이었지만 걷는 동안 느꼈던 넘치도록 풍성한 사유의 시간은 존재의 깊은 곳으로 안내하는 시간이었고 오롯이 라보에시의 사상에 푹 빠질 수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걷는다는 것은 공간을 걷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걷는 것이다. 시간은 걷는 사유의 길이와 깊이에 따라 늘어나기도 하고 거리의 길고 짧음의 물리적 거리마저도 지배한다. 걷고 있을 때는 목적지가 목적이 아니라 걷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4시간을 걸었어도 좋았을 그 길은 세상의 모든 존재들 속에서 나 자신을 찾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는 소중한 각성의 시간이었다.


걸으면 삶을 흔들어 놓는 온갖 번잡한 생각의 파편들이 정리된다. 무수한 상상들이 찾아오고 영감을 떠올리게 하며 깊은 사색에 빠지는 시간들이 된다. 초저녁 아파트 뒷산 산책길에서 만나는 아기자기한 풍경들은 그에 맞는 소리들로 찾아온다. 귓전을 간질이는 풀벌레 소리, 바람이 풀잎을 스치는 소리, 가끔은 부엉이 같은 큰 새소리와 작은 산새 소리도 들린다. 지친 하루가 치유되는 시간이다. 수많은 소리들은 귀를 기울여야 들리는 소리들이다. 그 소리들을 음미하고 걸을 때면 먼 과거의 기억들과 읽었던 책들의 이미지들이 불려 오고 걷는 자를 시간의 힘을 거슬러 시간여행의 세계로 보낸다. 

다비드 르 브르통의 [걷기 예찬]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 행위 중 하나인 걷기에 대한 예찬으로 된 짧은 책이다. 걷는 것만큼 여유로운 책이다. 한 손에 들어오는 조그마한 양장본의 이 책 표지는 산책하기 좋은 숲 속의 길을 찍은 사진이다. 안개가 얕게 들린 숲길. 자신의 발자국 소리마저 흡수될 것 같은 길 위에 산책자인 듯 순례자인 듯한 사람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인다. 이 길은 아마도 매일매일 다른 모습으로 이 길 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타날 것이다. 매시간대에는 또 다른 얼굴을 하고 그 길 위에 있는 사람들을 맞는다. 

 

산책은 친숙한 것의 낯섦을 고안해낸다. 산책은 디테일들의 변화와 변주를 민감하게 느끼도록 함으로써 시선에 낯섦의 새로움을 가져다준다.(138p)


우리가 매일 보는 일상의 길들이 그렇듯 길은 야누스의 얼굴처럼 신비롭게 변한다. 걷는 속도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고 사유의 깊이에 따라서도 시시각각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같은 길이라도 돌아오는 길의 풍경이 달라져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얼마 전 가창의 숲길을 걸었던 적이 있다. 정상에 주차하고 주차장 옆으로난 임도길을 따라 내려가면 울창한 숲으로 인해 햇살이 걸러지고 비늘처럼 반짝이는 길이 있다. 그 길은 영락없이 [걷기 예찬]의 표지 사진 같은 길이다. 비록 오후라 안개는 없었지만 지나는 사람 하나 없는 그 길, 그 길에서 만나는 낯선 생명들의 경이는 또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했다. 몸과 영혼이 정화되는 느낌. 피톤치트의 향내는 도시 속에서 찌든 폐에 깨끗한 공기를 넣어주고 마치 투석환자의 피처럼 모조리 깨끗한 피로 교체되는 느낌마저 들었다. 함께 걷던 동행자와 나누는 경이는 모퉁이를 돌 때마다 감탄을 자아냈고 우리는 잊을 수 없는 삶의 이미지 하나를 간직하는 셈이 되었다. 


걷기는 세계를 사물들의 충일함 속에서 생각하도록 인도해주고 인간에게 그가 처한 조건의 비참과 동시에 아름다움을 상기시킨다.(237p)

걷기는 삶의 불안과 고뇌를 치료하는 약이다. (255p)


걷는 사람에게 인생은 진지하다. 진지하지 않으면 하등의 걸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운동 중이거나 단순하게 이동이 목적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거창한 인생의 기원에 대한 고민은 아닐지라도 일상에서 발생하는 관계의 충돌로 인한 고민거리들은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상쇄될 수 있는 아주 좋은 치료약이라 믿는다. 걷기로 마음먹는다는 것 자체가 문제의 원인을 스스로 찾고 그 해결책을 마련하기 위함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적극적인 준비단계에 들어선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산책길에서 책 하나가 나온다고 했다. 누구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산책길이든 어느 길이든 걷는 동안은 수많은 생각들 속에서 적어도 인생 하나가 나올 만큼의 깊은 생각에 빠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날 때 걷든 시간을 내어서 걷든 걷는다는 것은 저자의 말처럼 불안과 고뇌를 치료하는 약이다. 바쁜 일상 속을 사는 우리지만 자주 걷는 것이 영이든 육이든 건강에 좋은 것이다. 자주 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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