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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드 Nov 08. 2019

영화 82년생 김지영

여자는 무시된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이 나라든 다른 나라이든 그 어디서든 여자는 무시된다. 자궁을 벗어나 자신의 자궁에 생명을 담을 때까지 또 그 생명을 세상에 내놓아도 여자는 무시된다. 인류가 그 존재를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한 여자는 남자의 존재 이유만큼이나 그 존재의 중요함은 우열을 가릴 수가 없다. 그런데 아주 많은 곳에서 여자는 무시된다. 화성에서 온 남자는 금성에서 온 여자와 어느 날 운명처럼 만나지만 그 행성의 크기만큼이나 아주 작은 존재로 무시된다. 한 번에 수억 개의 정자를 생산하고 뿜어내는 남자의 정자는 단 하나의 정자만을 적시하지 않은 채 오로지 "0"에 가까운 확률로 잉태되고 태어난다. 수억만 분의 일이라는 확률로 여자의 자궁 속 난자에 안착한 생명은 또 하나의 남자든 여자든 생명체로 자라기 위해 세포분열을 한다. 여기서 남성과 여성 중 어느 성이 중요한지는 따질 필요가 없으나 결국 하나의 성이 없으면 어떤 유전자도 대를 이어 수만 년 동안 종을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은 명약관화하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하나의 성은 어느 사회에서는 대체로 무시된다. 사회에서 가정에서 종교에서 그리고 남자의 자의식에서 또는 여자의 자의식 스스로...


사람의 관계성은 마르틴 부버의 말처럼 나와 너로 된 짝말이다. 여기서 부버의 책 "나와 너"를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지만 나라는 정체성은 너라는 존재가 있어야 성립된다. 마찬가지로 남자든 여자든 자연의 존재 법칙에서는 스스로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를 부정하면 역시 하나가 부정된다. 하나의 존재 가치만을 옹호하고 다름이라는 이유로 무시한다면 아니 어쩌면 힘의 논리로도 설명이 되겠지만 상대적으로 가벼운 존재란 없는 것이다. 특히 남자와 여자의 관계 속에서는 더욱 그렇다.


1년 정도 전에 김지영을 읽은 적이 있었다. 페미니즘을 대변하는 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탄탄한 구성과 작가의 설득력은 페미니즘을 옹호하고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라는 존재와 역할에 대하여 다시 한번 깊게 생각하고 남과 여가 공존할 수밖에 없는 사회에서 오히려 깊어진 반목에 화해의 제스처처럼 느껴졌다. 남성 혐오이든 페미니즘이든 사회가 세분화될수록 자연스럽게 수많은 대변의 목소리와 자신의 이기를 강조하는 목소리가 많아지기 마련이다. 한 측 만을 이해하자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설명하는 서로의 목소리에는 귀담아들을 필요가 충분히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한쪽이 없으면 한쪽마저도 스스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분명하게도 상호의존적 관계일 수밖에 없다. 


책을 읽은 지 1년여 만에 영화로 김지영을 다시 보게 되었다. 원작이 영화화된 경우가 적지 않으나 책을 읽은 사람에게 영화는 그다지 감동적이지 못하다. 그런 선입견에도 불구하고 극장 문을 열게 된 것은 아마도 공유와 정유미라는 두 배우에게 끌림이 아니었을까 싶다. 공유는 내 나름의 배우관에 의하면 상당히 섬세한 배우다. 특히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 대한 따스함과 공감을 잘 표현하는 배우라고 생각한다. 영화 도가니에서 보여준 그의 연기는 실제로 장애우를 대하는 애잔함이 그대로 묻어 나왔고, 그들을 위해 싸우는 연기는 실제로 그가 분노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표정 하나하나가 섬세한 배우다. 정유미 역시 좋은 배우다. 부산행에서 보았지만 그녀의 연기는 진지하다. 


이런 두 배우가 주연으로 나오는 82년생 김지영은 실제로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표현에 많은 관객들이 반응하는 결과를 보여주었다. 개봉 20일여 만에 200만 정도가 들었으니 성공적이라 할 수 있다. 나는 개봉하는 날 보고 적어도 500만 이상은 찍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에 과잉은 없었다. 있을 수 있는 일들, 어느 가정에서나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 깊은 공감을 유도할 뿐 생각은 전적으로 관객의 몫이다. 좋은 영화는 주장하지 않고 담담히 보여줄 뿐이다. 이 사회가 남성과 여성이 만나 결혼을 하고 생애 처음으로 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영화는 내내 잔잔하게 보여준다. 친구로 아버지로 또한 엄마로 빙의되어 말하는 정유미의 입을 통해 그동안 저 깊숙한 감정의 밑바닥에 채워두었던 하고 싶은 말을 대변한다. 시어머니의 딸이면서 누군가의 딸인 며느리는 왜 그렇게 다르게 차별받아야 하는 것인지. 왜 고단한 육아의 틈에 잠시 쉬러 나온 카페의 정유미는 맘충이라고 비난받아야 하는 건지. 직장에서는 왜 결혼과 출산이 자연스럽게 퇴사로 이어져야 하는지 많은 질문들을 던져준다. 


나는 김지영을 피해자로 보지 않았다. 불합리한 사회구조와 여성이라는 성에 대한 편견, 그리고 사회적 약자로서의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 보았다. 여성에게 쏟는 감정적인 동정이 아니라 아무리 시간이 흘러가도 변하지 않는 사회의 구조적 문제점들이 가슴 아프게 느껴졌다. 특히나 가부장적 남성 중심의 문화가 오래도록 뿌리를 내린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가정이든 사회든 그 문제의 해결이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특히나 미세한 아픔들을 안고 살아가는 그러면서도 이해받거나 공유되지 못하는 삶들은 분명 슬픈 일인데 그냥 감수하고 담담하게 살아가는 수많은 김지영들에게 미안한 일이었다. 


오늘날 남성 중심의 사회구조는 많은 곳에서 시대가 변하는 만큼 만족할만하지는 않지만 변화를 맞고 있다. 일하는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고 결혼과 출산과 육아가 경력단절로 이어지지 않도록 제도적 변화와 함께 기업이 수용할 수 있게 유도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 현실적으로 이런 모든 문제점들을 사회 전체가 포용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는 듯하다. 출산과 육아 휴직으로 2년 정도 쉬고 직장으로 복귀하더라도 여전히 육아 문제는 고민해야 될 숙제이며 직장에서 비워두었던 빈자리는 쉽게 복원되지는 않는다. 사회 전체의 공감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느 광고 카피에서 들은 말이다. 한 아이가 세상에 나오고 성인으로 자랄 때까지 온 사회가 하나의 가족처럼 돌봐주어야 한다. 


결국 영화 속 김지영은 자신의 여건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았지만 이 시대의 수많은 김지영들은 아직도 가정에서의 불편한 대우와 직장에서 여성으로서의 편견 등으로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영화를 보고 난 다음의 평도 응원과 악플이 반반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역지사지다. 영화 속의 김지영을 향한 부당함은 객관적으로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부당함이다. 여성의 위치, 역할, 페미니즘 반대 등 그런 것들을 논하기 위함이 아니라 영화 속의 김지영이 처한 부당한 상황들을 공감하자는 것이다. 그 자리가 내 자리일 경우에도 그런 부당함을 충분히 스트레스 없이 감내할 수 있을까? 그런 삶을 묵묵히 견디며 살아갈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견딤의 문제일 뿐 부당함의 전환이라든지 부당함의 인식의 문제라는 측면에서는 해결책이 아니며 악플로 말하는 그들의 불평 부당함은 결국 나의 일이 아니라는 타자성과 다른 성에 대한 불편함일 뿐이다.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남자든 여자든 내가 어떤 성을 가지고 태어날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순전히 운명적인 상황이라면 나 역시 상대의 성으로 태어날 수 있다는 전제는 이 세상 누구도 편견과 차별받지 않는 평등한 삶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힘을 싣는다. 반목하고 서로 공격해야 할 다름의 문제가 아니라 상대성을 이해하고 돕거나 이해하는 것이 건강한 사회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래서 영화 김지영은 논란, 혹평, 악플이 아닌 의식의 전환이 필요한 던져진 질문이다. 


오랜만에 영화를 보면서 울었다. 시집살이에 지쳐 남몰래 울던 어머니가 생각났고, 김지영처럼 제때에 친정에 가지 못하던 애들 엄마도 생각났고, 아이 셋을 낳고 20년 넘게 살아도 여전히 시어머니는 어려운 제수씨가 생각났었다. 사회는 아직 큰 기대는 않치만 가정에서 만큼은 충분히 공감하고 살아야 할 일이다. 영화를 보면서 가족 중 누군가를 떠올리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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