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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드 May 09. 2016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

치유되지 않았던 유년의 기억들

일요일 하릴없이 딩굴거리다가 문득 단숨에 읽을 만한 책이 필요해졌다. 몇주전에 사다두고 읽지 못했던 앏팍한 책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어떤 생각으로 이 책을 구입하게 됐는 지는 아무리 머릴 굴려봐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다만 제목에서 느껴지는 우울함 때문이지 않았을까? 표지에는 달리는 차창에서 밖을 내다보는 어떤 남자가 있다. 밖의 풍경은 멈춰져 있지 않고 흐리다. 눈 빛은 한곳에 고정되어 있지만 결코 한곳에 머물러있지 않는 듯하다. 먼 생각의 저편을 응시한다.


책을 읽는 동안 팔에 턱을 괴고 있는 그가 담담히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 놓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때 우리집은 겨우 벽지로 버티고 있는 집같았어요" 우물거리는 듯한 그의 말투가 들릴 듯 말 듯 귓가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의 눈을 보고 있지 않았다면 그가 하는 말을 듣지 못할 뻔 했다. 지나간 어린시절의 희미한 추억과 가족들에 대한 사랑, 그리고 어느 시대 어느 장소든 있었을 법한 21살 젊은이의 반항과 방황에 대한 이야기다. 어쩔 수 없는 열정들,  그때는 그것이 모든 것이고 영원할 줄 알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시간에 퇴색되고 바래지고 뒤틀려 지면서 하루하루의 아쉬운 작별을 고할 수 밖에 없는 이야기들이다.


누구든 알랭드 레몽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자신의 이야기를 남의 입을 통해 듣는 듯하다. 실제로 어린시절엔 그러했으니까. 맞장구라도 치고 싶어진다. 그가 이책을 쓸 때의 나이가 53이었으니 얼추 나와도 나이가 비슷하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장소가 달랐을 뿐이다.


잊지 못할 유년의 기억들이 레몽의 것과 나의 것이 지리적 문화적 시간적 거리감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중첩된다.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기억들, 그리고 놀이에 열중하던 우리 둘 형제의 신나는 기억들, 방황에 삶을 포기하고 싶어 가출했던 기억, 시를 쓰고 산문을 쓰던 그 시절에 대한 기억들 그 속에서 나는 눈을 감고 의자를 젖힌다. 한편의 영화처럼 앞과 뒤가 선명하게 눈앞을 지나간다. 젊은 시절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슬그머니 올라와 미소짓게 한다. 바람부는 날 어머니는 단아한 한복을 입으시고는 유원지로  소풍을 데려갔다. 강가의 모래가 사근거리며 밟히고 어머니는 나를 안고 바람처럼 겨드랑이를 간지르며 깔깔 거리고 웃는다. 사진사였던 아버지는 연신 사진을 찍으시며 마치 행복이 지나가 없어지기라도 할 것처럼 카메라에, 기억에, 시선에, 담아두기에 여념이 없다.


어린 날의 행복했던 기억들은 늘 미소짓게 한다. 물론 아픈 기억도 있다. 그런 것은 묘하게도 지워버릴래야 지워버릴 수가 없다. 가정은 행복과 불행이 늘 교차하고 그 속에서 어린 나는 어리광을 부리기도 하고 때론 어두운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두려운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볼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지나간 것이다. 그 지나간 것이 있기에 나역시 여기에 이렇게 존재하는 것이다.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은 흐린날 비가 조금이라도 오면 좋겠다. 빗물방울이 탁탁 윈도를 때리고 창밖의 세계가 몽환처럼 빗물과 함께 흐르는 카페에서 읽으면 좋을 듯한 책이다. 재즈같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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