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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드 Aug 16. 2016

휴전 - 프리모레비

진정한 고통의 끝에 도달한다는 것.

매미가 우는 가로수 터널을 지날 때면 쇳소리같은 매미소리가 양쪽 귀를 후비고 들어와 눈 뒷쪽어딘가에서 야릇한 소리로 부딫혀 뇌를 자극하는 송곳 같다. 이런날엔 양미간의 주름이 신경질적으로 패이고 체온을 훨씬 웃도는 습한 열기가 힘겹게 서있는 두다리마저 절름발이로 만들어 버릴 만큼 맹렬하다. 늘 그랬을까? 올해 여름은 유독 덥다고. 사실 지나간 기억의 어느 한때가 모질게 아프고 힘들었더라도 지금 겪고있는 나의 현실이 더욱 아프고 슬픈 것처럼 계절 또한 그렇치 않을까 싶어진다. 사람에게는 항상 과거의 아픔보다는 지금 당장 눈앞에 닥친 아픔과 고통이 더욱 크게 느껴지는 법이다. 하지만 프리모레비의 글들에서 느끼는 최상의 아픔은 과거나 현재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될 수 없을 만큼의 아픔이다. 상상하는 것조차도 힘든 고통이 그의 날렵한 글들에서 자세하게 묘사될 때면 가슴에서 느껴지는 현실감은 기실 현장감마저 느껴지게 한다.


고통을 증거하는 문학들은 많이 있다. 특히 아우슈비츠를 증언하는 글들은 그 내용의 깊이나, 문학적 탄탄함을 떠나서 읽는 독자를 고통스럽게 한다. 빅터 프랭크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그리고 프리모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는 아우슈비츠의 나치만행을 증언하는 글들 중에서도 탁월한 작품에 속한다. 한나아렌트의 글도 훌륭하지만 수용소에서의 비참한 삶에 대말할 때 이 두 작가 만한 사람은 없다. 이런 장담이 혹 경솔하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읽어본 사람이라면 고개를 그떡일 수 밖에 없을 거라고 믿는다.


"휴전"은 "이것이 인간인가" 와 더불어 작가의 의도이든 아니든 2부작이다. "휴전'의 전작인 "이것이 인간인가"는 그가 수용소에서 겪은 타의에 의한 극단의 잔혹함과 그로인해 비인간화 되어갈 수밖에 없었던 유태인들의 비참한 삶에 대한 증언이 목적이었다. 타자인 나치의 무자비한 폭력에 대한 고발이기도 하겠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타자의 가학으로 인하여 극도로 인간성을 상실해가는 인간의 연약함의 증언이라고도 할 수있다. 그의 글은  읽는 내내 몸의 근육을 경련시켜 힘들게 한다. 이럴 수가라는 자조와 탄식이 연발로 뇌속을 휘젓는 일은 몇 페이지를 넘기지 않고도 문득문득 유령처럼 나타나 읽는 이를 놀라게 한다.


"휴전"은 프리모레비가 수용소에서 수감되어 노역에 동원되던 중 2차대전이 종식되고 우여곡절 끝에 이탈리아로 돌아가는 9개월간의 귀향의 긴 여정에 대한 글이다. 구속된 몸에서 자유의 몸이 된 레비는 비록 몸은 구속에서 풀려났지만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없었다는 점에서는 그 비참함이 아우슈비츠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인간의 고통이 자의적 욕망으로 인한 결과였다해도 그 고통은 역시 아프겠지만, 타자의 이유없는 폭력으로 인한 고통의 깊이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아픔이 된다.


그들(러시아 군인들, 해방군)은 인사를 하지도, 미소를 짓지도 않았다. 음울한 광경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게 하고 입을 봉해버리는, 감히 무어라 할 수 없는 혼란스런 감정이 동정심과 더불어 그들을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바로 그 부끄러움이었다. 가스실로 보내질 인원 선발이 끝난 뒤, 그리고 매번 모욕을 당하거나 당하는 자리에 있어야 했을 때마다 우리를 가라앉게 만들던 그 부끄러움, 독일인들은 모르던 부끄러움, 타인들이 저지른 잘못 앞에서 올바른 자가 느끼는 부끄러움, 그런 잘못이 존재한다는 것에, 그런 잘못조차 존재하는 이 만물의 세상 속에 돌이킬 수 없이 자신이 끌어들여졌다는 것에, 그리고 자신의 선한 의지는 아무것도 아니거나 턱없이 부족하고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는 것에 가책을 느끼게 만드는 바로 그 부끄러움이었다-19p


고향으로 돌아가는 들뜬 순간에도 구사일생의 남은 숨이 한순간 꺽여 버릴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그야말로 고통이다. 입고 먹고 배설하는 아주 사소한 인간의 생리적 욕구마저 해소 할 수 없는 긴 여정 속에서 고향에 도착하는 미래의 한시점은 제논의 화살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특히나 환대를 받아야할 그들이 오히려 무관심으로 버려질때 그들은 자신의 손목에 깊이 새겨진 타투(수인번호)와 누가봐도 한눈에 알 수밖에 없는 수용소의 초라한 행색으로 인해 피해자인 그들을 오히려 부끄럽게 할 뿐이었다. 그 고통속에서 그는 자신의 아픔을 함께하는 동료들을 만난다.


휴전은 프리모레비의 세심한 인물묘사가 돋보이는 책이다. "이것이 인간인가" 출간 후 약15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에야 썻다.  수용소안의 숨막히는 고통과 치열하고 비참한 삶을 증언해야 했기 때문에 한줄로 줄을 긋듯이 빠르게 써야 했다면, 휴전은 비교적 안정된 상태에서 어쩌면 문학이라는 틀을 고려하고 쓴 책이기 때문에 문장이라던가 단어의 선택까지도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썻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전작인 "이것이 인간인가"가 문학적이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두 작품 모두 문학적 틀안에서 빼어난 수작임에 틀림이 없는 책이다. 그의 글들은 매끄럽고 묘사가 뛰어나며 사실적이다.


특히나 체사레나 그리스 사람 모르도 나훔에 대한 묘사는 긴여정을 함께한 자들이기에 그들에 대한 글은 성격과 사상까지도 자세하게 그려진다. 그들을 통해서 레비는 인간본성에 대한 깨달음 같은 것을 얻지 않았을까.


그는 신발이 없는 것은 굉장히 심각한 잘못이라고 내게 설명했다. 전쟁이 일어나면, 모든 것에 앞서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한다. 첫번째가 신발이고 두번째가 식량이다.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듯 순서를 바꾸면 안 된다. 왜냐하면 신발이 있는 사람은 먹을 것을 찾아 돌아다닐 수 있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은 끝났잖아요."나는 반박했다. 그 몇 개월의 휴전 기간을 살았던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나는 오늘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보편적인 의미에서 전쟁은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전쟁은 늘 있는 거야." 모드로 나훔의 잊을 수 없는 대답이었다.


냉철하지만 시니컬한 모르도 나훔을 통해서 인간의 삶이란 것이 회색빛 처럼 희망이 없어 보여진다. 삶이란 것에 늘 그런 것이 존재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일견 편한 삶일진 몰라도 삶의 격이란 것을 생각할 때는 힘없이 주저앉고 타협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나약한 본질만을 확인할 뿐이다. 인간은 그저 먹고 마시고 배변하는 것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하지만 아우슈비츠는 오로지 그런 생리적인 것만을 생각하게 만드는 공간이다. 그곳에서의 삶이 인간의 본성까지도 그렇게 바꿔버릴 만큼 강력한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 그들은 그곳에서 벗어나 어디든 갈 수 있는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이미 몸에 베어 버린 살기위한 몸부림의 방식은 벗어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귀향의 여정은 아우슈비츠의 연장이다.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들의 품에 안기는 그 때부터가 그들에겐 진정한 삶을 확인하는 종착이자 또 다른 시작이지 않았을까.


열차는 항상 국경부근에서는 긴 시간, 아니 몇일 동안이라도 멈춰져 있었다. 그것이 그들의 귀향의 기간을 알 수 없도록 길게 늘이게 한 원인인기도 했다. 먹고 마시는 것, 그리고 입는 것이 자유롭지 않은 여정은 그로하여금 그 여정의 끝을 알 수 없도록 하고  많은 사람들을 불안하게 했다.


사람이 끝을 알 수 없는 고통에 있다면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아갈까? 수용소의 비참한 삶은 스스로 죽는 것마저도 포기할 만큼 큰 고통이었지만,  자신을 구속하고 괴롭히는 도무지 끝날 것같지 않은 고통스런 삶은 그 자체만으로도 순간순간을 자학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든다. 특히나 누군가의 감사한 도움의 손길 마저도 없다면 말이다. 레비의 귀향이 그러했다. 피해자일 뿐인 그들을 오히려 냉대하는 전쟁 후의 사회는 그들을 더욱 깊은 자조의 늪으로 빠뜨리고 말았다.


국민은 거대한 권력으로 부터 끊임없는 폭력에 노출 되어있다. 300명이 넘는 아이와 남편과 아내와 부모가 깊은 물속에 잠겨버려도 책임을 진다는 권력은 없다. 22명의 노동자가 스트레스로 죽고 자살해도 사회는 무관심으로 방치되고, 생존권을 주장하기위해 송전탑 건설을 반대해도 지역 이기주의로 매도되어 오히려 사회의 가해자가 되어버리는 현실은 지극히 비정상적이지만 그 끝을 알 수 없다. 비정상적인 것들의 지속성은 이 나라에서 왜 이리도 긴것인지 모른다. 피해자인 그들의 가슴에 남겨진 고통은 그 끝을 알 수 없어 지쳐 버리기를 바라는 것인지. 레비가 9개월의 긴 귀향의 여정에서 느꼇을 고통에 다름아니다.


언제 끝이 날까? 누군가는 비정상적인 것들은 많은 시간이 걸리든 그렇치 않든 정상적인 것들을 향해서 흐르는 것이 자연 법칙이라고 말한다. 자연의 정화능력이 그렇고 몸의 면역능력이 그렇다. 그러한 것이 민주적사회 방식에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비정상적인 것들은 한 순간 끝없이 기세를 올려 영원할 것처럼 보여지기도 하지만 결국은 파멸에 이르고 정상적인 것들에 원래의 자리를 내어준다. 파시즘이 그랬고 나치도 그랬다. 일본의 군국주의도 그렇게 영원할 것 같지 않았던가. 36년간의 식민통치가 그들의 패전으로 인해 우리에게 본래의 자리를 다시 내어준 것처럼 그들은 그렇게 끝을 보이고 말았다.


자정 능력을 믿을 뿐이다. 현재의 삶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는 권력이 있다면 그 권력은 국민에게는 비정상적인 권력이다. 큰 물이 일어나 모든 더러운 것들을 한 순간에 휩쓸어 밀어버리든, 아주 오랜 세월에 걸쳐 막힌 바위를 돌아나가는 물줄기 처럼 정상적인 것들을 향한 자정능력과 생존의 본능은 그 어떤 것들도 막아서 영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다. 9개월간 레비가 생을 포기하지 않고 견뎌낸 것처럼 집이라는 그 희망에 긴 귀향의 고통에 끝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결국은 도달아야할 정상적인 것들의 고향이 있을 것임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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