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드 Sep 26. 2016

사육장쪽으로 생긴  홀

편혜영의 디스토피아에서 느껴지는 불편한 공감

편혜영소설에서 느끼는 작가와 독자의 공감은 불편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는 내면의 끄덕임은 그냥 그대로 이기에 겨우 불편함을 넘어선다. 토요일 하릴없는 몸을 일으켜세워 정홍수의 평론집 "소설의 고독"을 읽다 교보문고 장바구니에 채워둔 것들을 찾아 집을 나섰다. 장바구니에 담긴 것들 중 하나가 편혜영작가의 "사육장쪽으로" 다. 작가의 흔치않은 이름때문인지는 몰라도 언뜻 시선이 박힌 편혜영의 얇은 장편(홀) 하나를 더 추가해서 돌아왔다.


"홀"은 200페이지 남짓한 장편(?)소설이고 "사육장쪽으로"는 8편으로된 단편소설집이다. 하지만 읽어보면 장편이나 단편이나 작가가 하고자하는 말의 의미는 어떤 맥락에서 비슷하다. 그것은 디스토피아다. 그 부정할수없는 세계로 사회의 부정적 측면을 들추어내다 보니 공허하게 돌아 다시 제자리로 오고마는 가위눌림의 고통처럼 느껴진다.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고 팔뚝에는 굵은 핏줄자욱이 불뚝불뚝 튀어나올 것처럼 경련이 느껴진다. 말을 하고싶어도 할 수 없고 그 말을 담은 몸짓마저도 전혀 의도와는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소통의 부재는 홀의 화자 오기에게서 답답함으로 공감되어 지고 있다. 그 소통의 부재는 권력에 의한 약자의 그것일 수도  있고, 또한 작은 의미에서는 사회에서 가장 작은 집단인 가족안에서의 불통이라고도 할 수 있다.


통어하지 못하는 가족과 사회 그래서 서로는 마비된 것처럼 움직이려해도 움직일 수 없는 어떤 구멍속으로 빠져들고 마는 느낌이다. 구멍은 단절이다. 결국 빠져 버릴 수 밖에 없는. 개짖는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려고 하지만 미로에서 길을 잃은 것처럼 제자리를 맴도는 가족들이나(사육장쪽으로), 한밤의 공사중 늪에 빠져 서서히 잠기는 자기몸을 보고도 허우적 댈수조차 없는 남자(밤의 공사), 남자를 버려두고 멀리 먼곳으로 도망가려하지만 어쩔 수 없이 되돌아오고 마는 여자(소풍) 처럼 작가는 마치 너희가 가봐도 결국 거기일 수 밖에 없는 현실을 몇편의 글로 세뇌시키려하고 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해도 돌아오는 대답은 공허하다. "어떤 가정도 낙관적이지 않았다. 이 순간을 무사히 넘기더라도 얼마 후 비슷한 일이 끝없이 반복될 것 같았다." (홀184P)  


하지만 각 이야기의 시작은 무료한 삶의 전환을 꿈꾸는 것으로 시작한다. 새로운 집을 사고, 여행을 하며, 금간 담벼락을 고치려한다. 비루한 보통의 사람들이 그 지루한 삶을 위로받고자 모이는 무심한 금요일의 밤에도 그러한 노력은 가위눌림의 삶에서 벗어나보고자 하는 작은 노력들이다. 그러나 그 위로받을 노력조차도  뜻하지 않은 사고로 절망에 이르거나, 죽거나, 금요일의 밤이 자기의 삶에 대단한 위로가 될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도구일 뿐이다. "역시 비슷한 일이 끝없이 반복되는 무기력한 일상은 커져가는 공동이며 그 공동에 빠져드는 내 모습이라는 것을 알아갈 때"(홀 185P) 독자는 역설적으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삶은 데쟈뷰다. 지옥같이 고통스런 과거의 모습이 현재도 변하지 않는 흉물처럼 자신을 활키고 있다. 모든 부정한 삶을 청산하고 이전과는 다른 길을 가겠다 다짐해도 내겐 여전히 남의 주머니에 손이가는 전직 소매치기의 손목처럼 인생은 결국 똑같은 형상으로 다가온다. 거울의 나를 알아가는 라캉식의 자기 존재 인지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나와 불안한 현실과의 조우라는 것은 늘 자조적 긍정으로만 이길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삶이 내게 주는 의미는 무었이란 말인가? 그런 의미에서 소설은 힘든 섬뜩함으로 다가온다.


비난할 수 있는 대상의 부재다. 부조리하고 비참한 삶의 근본적 원인이 있어야 함에도 그 대상은 늘 저만치 어둠속에서 그 큰입의 섬뜩함으로 존재하는 듯 존재하지 않는다. 아내의 자신에 대한 고발장에 놀라고 사육장으로 가는 길에 늘 만나게되는 큰 트레일러의 횡포와 그것으로 인해 사고를 당하게 되고 마는 소풍의 남자처럼 위해를 가한 존재는 있어도 그것으로 인해 마비되고 비틀려진 내 인생에 직접적으로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은 일순 보일듯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부조리함의 끝을 보는 느낌이었다. 헉슬리의 멋진신세계나 오웰의 1984에서 느껴지는 암울하고도 거대한 디스토피아의 세계가 아니다. 오히려 작은 공간을 차지하고 살아가는 메트리스적 개인의 삶을 엿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강의 채식주의자와는 조금은 차별되고 깊은 피폐함의 근원이 느껴진다. 거기서 나를 발견하는 독자로서의 나는, 작가와 공감을 이루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개짓는 소리를 향해 공간을 빠져나가려고 발버둥 치는 나와 결국은 구멍에 빠져들고마는 나를 거부하는 자신을 만난다면 그럴 수 밖에 없는 자위의 소심함만을 엿보게 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봉하마을에서 만나는 "세상의 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