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드 Oct 03. 2016

남쪽 계단을 보라

"피아노와 백합의 사막" - 윤대녕

"너는 무슨 병을 그리 앓고 있는 것이냐, 그게 어디서 온 마음이길래, 다쳐서 차라리 단단해진 마음은 다 어디 갔길래, 너는 누굴 할키면서 그리 아프다 소리치는 것이냐(배암에 물린 자국)"


소설을 읽으면서 어떤 대단한 공명 (共鳴)을 바라지는 않는다. 소설은 재미있으면 되고, 그저 이런저런 류의 삶이 상상하던 픽션이되어 향수같은 환상이나, 작가가 생각하는 그 장소, 상상속의 인물에 대한 엿보기 정도의 즐거움 아니겠는가? 하지만 윤대녕의 책을 읽으면서 가슴에 잠자고 있던 중년의 반항과 현실을 도피하고 싶은 꿈을 들켯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오롯이 작가가 나에게 공명을 일으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하릴 없이 잔잔한 수면위로 던져지는 잠자는 불안한 존재의 나를 깨우는 납작한 돌맹이질이었다.


"피아노와 백합의 사막"에서 화자는 문득 어린시절 친구인 송갑영과 함께 어릴적 보았던 사막을 꿈꾼다. 그런 꿈이 막상 현실이 되었을 때 사막이란 말에 붙들리고 늪에 빠진 것처럼 헤어나오질 못했다. 화자는 증권회사의 직원이다. 12일간의 갑작스런 긴 휴가를 반가워할 직장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사막이라는 늪에 빠진 그는 결국 회사 동료와 아내의 만류를 무릅쓰고 사막에 가는 것을 결행한다. 윤대녕작가의 글에는 이렇듯 정상적이고 평범한 삶으로부터 비틀어진 일탈을 꿈꾸는 남자들이 등장한다. 회사를 무단결근하고 경주에서 동해로 여행을 하는 남자(신라의 푸른길), 그리고 사막을 향해 떠나는 남자(피아노와 백합의 사막)가 그렇다. 물론 다른 6편의 글도 어떤 의미에서는 잠시 평범한 일상에서 튀어져 나가고 싶은 깊은 욕망을 표현하고 있다. 그것이 자의가 되었든 타의에 의한 것이 되었든 어제와 오늘의 무기력한 시간들에게서 해답을 찾을 수 없는 나라는 존재의 근원을 찾기 위한 열망이 된다. 망루가 된 아파트에서 새무덤에서 그리고 황망한 사막의 거리나 바다의 거리에서 그리고 지하철 남쪽계단을 내려가는 데쟈뷰된 하늘색원피스의 여자가 그렇다.


뜨거울 것이라고 기대했던 여행은 그러나 여지없이 차가워진다. 사막에서 화자는 그토록 바라던 사막에 가서도 꿈꿔왔던 사막을 보지 못했다. 화자에게서의 사막은 고작해야 이국취향에서 말미암은 사춘기적 동경에 불과했지만 그 멍석크기 만한 사막이 자라 이제는 세계면적의 3할이되도록 커져버린 그 사막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게 된 것이다. 그 사막 크기만큼이나 되는 자기존재와의 거리를 좁힐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여자가 말한다 "사막을 동경하는 사람은 지독한 자기 근친적 사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거나요" 어쩌면 자기애의 깊은 곳에 빠져든 화자는 황량하게 펼쳐진 중국의 사막을 눈앞에 두고도 사막을 보지 못했다. 오히려 그 사막을 가지게된 근원(송갑영)을 깨닫게 되고 그는 극심한 쇼크상태에 빠지고 만다. "세상은 손으로 만지기만 해도 사라져버리는 것투성이예요. 그냥 놔두고 볼 수밖에 없는게 너무도 많아요. 우리 그런 거 함부로 짓밟지 말아요 네?" 여자의 한마디에 화자는 아직도 혼란스러운 자신을 깨닫는다.


언제든 누구에게나, 반복되는 삶은 비루하기 마련이다. 존재는 미미해지고 내일은 기대없는 오늘이 되고 만다. 그런 삶이란 것이 조그만 충격에도 지난 날의 내가 꿈꾸어 왔고 존재케 했던 것을 상실하게 하고 쉽게 미망에 빠지게 한다. 그것이 나에 대한 타자의 간섭이 될 수도 또는 폭력이 될 수도있다. 배암에 물린 화자는 그 배암을 찾아 복수하기 위해 날마다 참나무 가지로 숲을 쑤시고 다닌다. 어찌보면 배암의 입장에서는 자기 생명의 위협에서 방어적인 행동이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정당한 행동의 댓가로 또 다시 생명의 위협을 받게되는 것이다.


사막에 대한 꿈을 꾸게 된 원인 역시 그러한 비루한 삶이 자신을 공격하는 것에 있지는 않을까? 그 꿈을 강행함으로 해서 오히려 고통스러워지고 힘들어하는 타자들도 있다. 물론 그들을 위해서 나에게 허락된 조그만 일탈까지 포기할 필요는 없다. "너는 무슨 병을 그리 앓고 있는 것이냐, 그게 어디서 온 마음이길래, 다쳐서 차라리 단단해진 마음은 다 어디 갔길래, 너는 누굴 할키면서 그리 아프다 소리치는 것이냐(배암에 물린 자국)" 나는 무의식적으로 누구를 할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할키면서도 나는 내가 너무 아프다 소리치고 있다. 무수히 다쳐서 굳은살이 된 단단해진 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나는 누구를 할키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그것이 지극한 자기애의 표현이 되는 것이다.


얼마전 아무런 대책도 없이 다니던 직장에 사직서를 던졌다. 그저 내 발뒷굼치를 물었던 배암에게 복수하고 싶었고 그 옛날부터 꿈꿔왔던 보름정도의 제주도 여행을 위해서였다. 황홀한 사막을 보고 싶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내 속에 응어리진 배암에 대한 복수는 그저 참을 수 있는 무료함의 핑게였다. 나의 현실은 아슬아슬하게 서있는 망루와 같았고 남쪽계단을 내려가는 하늘색 원피스입은 여자를 쫏아가고 있었으며 길이 끝나는 바다의 거리에 있었다. 손으로 만지기만 해도 사라져버릴 것들에 대하여 나는 너무 욕심을 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겨우 서서 내 삶을 지탱해주고 있는 것들에 대한 소중함이 없었다. 손을 대고 무너져 버리더라도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었던 자기애였다. 명료하게도 실존의 사막에서 묵묵히 견디어 내면, 자기를 볼 수 있는 거리가 조금쯤 가까워지지 않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사육장쪽으로 생긴  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