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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드 Mar 14. 2017

마른 똥 막대기

처음 내게 던져진 화두(話頭)를 생각하다.

새벽 2시 잠을 깻다. 우연히 듣게된 마른 똥 막대기라는 화두(話頭)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인분으로 거름을 주던 운문종의 수초 선사옆을 지나가던 중이 부처가 무엇이냐고 묻자 그에게 던진 화두가 바로 "부처는 마른 똥 막대기"라는 거였다.


같은 직장에 근무하는 불심 깊은 동료가 원체 완강하게 권유하는 바람에 우연히 영남불교대학의 천자문 대특강에 참석하게 되었다. 연 나흘을 퍼마신 술탓에 영과 육이 지쳐있었던 터라 막상 가겠다고 해놓고도 한편으로는 내키지 않았던 것이 솔직한 마음이다. 그렇다고 애써 가지 말아야 될 이유를 찾았던 것은 아니지만, 굳이 가야 할 깊은 이유도 찾지 못했으니 거의 이끌리다시피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마음 깊숙한 곳에는 알수없는 갈증같은 것이 있었다. 불교 철학에 대한 궁금증도 있었더랬다. 사람들은 종교에 대한 좋건 싫건 나름의 선입견과 또는 자기 종교에 대한 절대적 우월감 속에서 살아간다. 종교를 갖지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사는 인생에는 종교라는 것이 나도 모르게 자리 잡고 있으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기독교를 기반으로 하는 내 인생에 갑자기 불교에 대한 알 수 없는 궁금증이 이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내친김에 맛이나 보자는 생각에 어지럽던 잡생각을 떨쳐버렸다.


영남불교대학은 내게도 인연이 있는 곳이다. 물론 많은 신자가 있는 곳이니 그곳에 발걸음 하는 사람들 중에 나와 인연이 있는 사람이 하나쯤은 있을 법하다. 그러나 그런 단순한 인연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약 20년 전쯤으로 기억된다.  그 건물을 대각선으로 마주하고 있던 조그마한 대학생 선교단체에 다닐 무렵이었다. 그때쯤 해서 세워진 건물 옥상의 거대한 금불상을 보고 애끓는 마음으로 기도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사람들을 현혹하는 그 커다란 불상으로 인해 사람들이 혹여 미혹당하지 않도록 열심히 그리고 간절하게 기도했다. 지금도 가끔은 그런 일들이 일어나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다른 사람이 믿는 종교에 대하여 왈가왈부 참견을 할만한 성격이 아니라는 내 생각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당시에는 정말 진지하게 그 단체에 속한 나는 그 불상이 허물 어질 때까지 기도해야 한다는 심정이 있었다. 그 기도가 하늘에 닿지 않았기에 여직 그 불상이 늠름한 자태로 아래를 굽이 보며 자비롭게 서있겠지만 당시에는 정말 절이 허물 어질 걸로 믿는 믿음이 있었다. 이런 것은 도대체 무엇이라고 설명해야 할까. 헛된 곳에 마음이 빼앗기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염려하는 이타적 사랑일까 아니면 교세를 확장하기 위해 다른 종교쯤은 간단하게 무시해도 좋다는 걸까.


근 일 년여를 기도했지만 불상은 여전히 그대로 그곳에 세워져 있었고 차츰차츰 우리의 기도제목에서 빠지기 시작했다. 부처의 눈이 우리 쪽으로 차츰 틀어져 우리를 보는 것만 같아 섬뜩해지기도 했지만 그렇게 잊혀 갔었다. 그렇게 독하게 기도했던 내가 그 절을 찾게 되었다는 것이 아이러니컬하지만 중년은 늘 미적지근하기 마련이니 세월에 중화된 마음 탓이 크다. 20년 전의 그 일로부터 난 그 길을 다닐 때마다 부처를 올려다보곤 한다. 그때마다 순진했던 기억이 부끄러워 피식하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머라고 생각하면 허무하지만 청춘은 늘 그렇게 끓어오르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손에 이끌려 도착한 불교대학은 애초에 생각했던 절의 이미지와는 많이 달랐다. 평일 저녁 7시를 전후한 시간인데도 많은 사람이 드나들었다. 건물의 용도가 가르치는 대학이다 보니 공부하는 분위기가 많이 느껴졌다. 고즈넉한 산사가 아니라 도시의 중앙에 위치한 절이라 특이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향냄새 같은 절 특유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 입구에 들어서니 사천왕상이 그 큰 눈알을 부릅뜨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왠지 예전 같은 섬뜩함은 없었다. 도리어 친근한 느낌마저 드는 것은 또 무슨 일인지.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문득 성경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이곳을 드나드는 많은 사람들의 순탄치 않은 인생에 자리한 허망한 마음이 그들을 이곳으로 이끌었을지도 모른다. 삶은 한구석에 늘 빈곳을 마련해두고 그 빈 공간을 채울 것을 찾는 법이다. 나의 경우에도 극도로 궁핍하고 헤어진 마음이 이곳을 찾게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엔 뭔가 채울 수 있는 것이 있을까?


그날 하루였지만 우학 스님의 불교적 강의 천자문을 듣게 된 계기 역시 그 허망한 빈공간에 대한 갈구함이었으니 자연스레 법당에 가부좌를 틀고 않게 되었다. 천자문에 무슨 불교적인 게 있는가 싶기도 했지만 글자 하나하나에 의미를 담아 불교적 용어를 강의하시는 노스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다. 정신을 집중하고 듣는 귀기울임에 별안간 던져진 화두란 말과 마른 똥 막대기. 순간 그 가르침에 심오한 뜻이 있는가고 스님을 바라봤으나 그 뒷얘기는 없었다. 화두란 그런 것이다.


불교에서 화두란 참선 수행자(參禪修行者)가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참구(參究:참선하여 진리를 찾음)하는 문제다. 즉 화(話)는 말이란 뜻이며 두(頭)란 앞서가다는 뜻이란다. 말보다 앞서는 것, 즉 참선을 통해서 언어 이전의 마음을 바로잡는 법이라고 했다.


불현듯 마음속에 던져진 똥 막대기라는 화두는 내가 가진 그 허망한 공간을 일렁거리게 했고 그 공간을 채울 수 있으리라는 미망의 원함이 온 가슴에 들어왔다. 그래서 그 수업이 끝나고도 수업은 끝나지 않았고 또한 잠을 자는 그 순간까지도 그 일렁거림이 숙면하지 못하게 했을 터였다. 밥을 먹으면서도 자면서도 참선의 모양은 아닐 지라도 결국 나는 말을 앞서가 마음을 바로잡으려는 참선을 했던 것이다.


똥 막대기에 무슨 심오한 철학이 있었던 것은 아니나, 지금은 볼 수 없는 어릴적 외가집에서 본듯한 흐릿한 기억 속의 똥 막대기가 응어리진 마음과 가라앉은 자비의 마음을 일깨워 준다면 그것 또한 참 심오한 똥 막대기다. 더러운 것에 몸을 담가 어지러워져 굳어진 마음과 저 아래 깊숙히 침잠해 있는 가슴을 똥막대기로 휘휘져어 풀어낼 수 있다면 하고 소원했다. 잠을 이루지 못할 만큼 화두에 몰두했지만 결국 내겐 부처는 없었다. 부처가 있어야 똥 막대기가 될 수 있는 것인지, 똥 막대기로 인하여 부처를 마음에 들일 수 있는 것인지 또 다른 화두로 인하여 참선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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