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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드 Jan 01. 2019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의 두번째 산문집

느낌의 공동체 이어서 두번째로 읽는 그의 산문집.  난 그의 글을 읽을때마다 상당한 어려움을 느낀다. 문장을 이해하기 어렵기도 하고 슬쩍슬쩍 부딫히는 단어가 생소하다. 어떨땐 책을 덮었다 폇다를 반복할 만큼 힘들어 한다. 하지만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몰락의 에티카를 읽었고 느낌의 공동체를 읽었다. 시와 소설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감성탓에  어쩔수없이 자존감에 상처를 입으면서도 오기로 읽기도 하고 성질을 내면서 읽기도 한다. 가끔 툭툭 지면을 뚫고나와 심장을 건드리는 그의 공허와 그가 느낀 세상에 없는 아름다운 언어를 처음 보는 것같은 설렘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흔치는 않았지만 그렇게 만나는 느낌이 그와 모종의 정신적 스킨쉽같은 것을 이루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알수없는 공감같은 것도 느끼게 했다. 그래서 그의 두번째 산문집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은 어쩌면 한치 망설임없이 내 서가 한부분에 꼽힐 수있었을지 모른다. 


슬픔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그런 슬픔조차 공부해야한다는 그의 말이 새롭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슬픔인데 타자의 슬픔을 충분히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내겐 같이 일하던 여직원이 하나있었다. 지금은 그만 두었지만 함께 일할때도 또는 그만두고 서도 인간적으로 공유할 부분이 많았던 사람이다. 그가 얼마전에 폐암선고를 받았다. 그에게도 청천과 벽력같은 선고였겠지만 그 소식을 그의 입을 통해 전해들은 나에게도 하늘이 무너질거같이 가슴이 아리고 눈앞이 막막해지는 것이었다. 비통할텐데도 애써 밝게 웃어보이는 그의 얼굴이 오히려 나는 더 슬퍼져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 일 이후 난 그와 더이상 통화를 하지않는다. 가끔 마주치는그의 인스타그램의 모습은 하나같이 검은 마스크로 얼굴이 가려져있었다. 그렇치만 눈은 밝아보였고 웃음기를 잃치않고있었다. 오랜만에 만난다는 그의 친구들의 모습에도 슬픔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사진을 찍기 전과 후의 어쩔수없는 죽음의 그림자는 그들의 마음을 흔들고 감정의 엄청난 누름을 견디고 있었을것이라는 것은 짐작할만했다. 우린 죽음앞에 서있는 사람을 대할때면 비록 그와 함께하진 못했을지 몰라도 그가 살아온 인생과 남겨질 사람들에 대한 애뜻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애뜻한 마음을 가지는 것만으로 정작 슬픔속에 있는 사람에게는 위로가 되지못한다. 고통과 슬픔속에 있는 사람을 제데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의 위로는 오히려 슬픔속에 있는 사람을 더욱 고통스럽게 할 뿐이다.  그는 맘데로 죽을 수도 없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삶은 더욱 고통스럽다. 8살박이 아들과 두살터울의 딸아이 하나, 자고 일어나면 마주봐야하는 그 천진 난만한 아이들의 얼굴이 암투병의 모든 고통스런 육체적 아픔을 포기하고 맘데로 삶을 결정하지 못하도록 한다. 그럼에도 이 고통스런 순간이 다 지나고 나면 그에게서 암덩어리가 툭하고 떨어져나가 다시 건강한 삶을 살것이라는 희망은 너무나 작다. 그런 그에게 어설픈 위로의 말들이 무슨 따뜻함을 줄 수 있을까?


위로는 단지 뜨거운 인간애와 따뜻한 제스처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나를 제데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나를 위로 할 수는 없다. 더 과감히 말하면 위로 받는다는 것은 이해 받는다는 것이고 이해란 곧 정확한 인식과 다른 것이 아니므로 위로란 곧 인식이며 인식이 곧 위로다.


슬픔이란 어느 순간 찾아와 문을 두드리는 낮선 방문객과 같다. 전혀 얘기치 못했던 일이었으므로 그 방문은 삶을 송두리채 흩으려 놓고 일상에는 균열이 생기고 만다. 그것은 이별통보일 수도 있고 누군가의 죽음이거나 나의 예견할 수 있는 죽음일수도 있다. 또한 전에는 인식하지 못했으나 어느날 갑자기 알게된 사회의 부조리함일 수도 있다. 다만 그것이 어떤 슬픔이든 간에 찾아온 낮선 방문객의 어두운 그림자는 견딜 수 없도록 고통스럽다. 나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위로가 필요하다. 그래서 함께 고통받는 사람들의 연대에서 우리는 위로를 받는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통해서 나는 적잖은 위로를 받았다. 삶에 대한 위로와 고통에 대한 위로를. 그의 언어는 따뜻하지 않다. 하지만 삶에 대한 슬픔과 그리고 충분히 고통스러워하는 그의 글을 통해서 무작정의 위로가 아니라 나의 슬픔과 고통이 무었인지 어렵풋이나마 알게 해주는 문학들을 만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삶이란 의미를 찾기 위해 질문을 던지는 그 순간에만 겨우 의미를 갖기 시작하는 것이니까" 이 대답은 아직 충분히 강하지 못하다. 그래서 나는 (당신과 함께) 더 많은 시를 필사적으로 읽지 않으면 안된다.

 

더 많은 소설과 시와 문학을 필사적으로 읽는 내가 되길 바란다. 슬픔과 고통을 아는 작가들의 글을 통해서 삶이란 의미를 들여다 보고 그들이 이해한 적절한 위로를 받으며 살고 싶다. 2019년 한해를 시작하는 지금 남은 삶이 또한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는 삶이게 하고 싶기도 해지는 새해 첫 새벽에..... 차가운 달냄새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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