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의 연기 (Suspension of Judgment)
전체가 아닌 부분 밖에 알 수 없는 인간으로서 어떤 의견을 대하는 태도가 비심판적(non-judgmental)이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후설이 강조한 에포케epoche의 실천이다.
그리스의 회의주의 철학자인 섹스쿠스 엠피리쿠스는 에포케를 다음과 같이 정의 내린 바 있다.
"Epoché is a state of the intellect on account of which we neither deny nor affirm anything."
("에포케는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하여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은 결과에 근거한 지성의 상태이다.")
여기서 에포케는 성급하게 최종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머리 속에서 어떤 견해에 대하여 ‘옳다 / 그르다’ 라는 판단을 전혀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평가를 하면서 해석하되, 자신이 미리 품고 있던 전제를 재확인 하지 않은 채 성급하게 결론을 내려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에포케 - 심판의 연기(suspension of judgment) 또는 찬성의 보류 (withholding of assent)는 연구방법론의 기본이며, 옳은 것을 찾아가는 초석이 된다. 삶 자체가 좀 더 잘 사는 방법을 찾는 연구이다.
퍼실리테이터는 회의에 참여한 사람들은 최대한 옳은 결정을 하도록 돕는 사람이다. 빠른 결정, 과거의 경험에 사로잡힌 결정이 성급하고 미숙한 결정으로 흐를 수 있는 경향을 경계하여, 보다 현명한 결정을 돕는 사람이다.
(예화) 은행창구
은행 창구에서 카드 발급을 위하여 서류 작성대에 비치된 볼펜으로 신청서를 작성한다. 양식을 채워가는 도중 볼펜이 나오지 않는다. 이 때 다음 두 가지 유형의 반응이 가능하다.
<반응 1>
‘이봐요. 여기 볼펜이 안나오쟎아요.’
‘여기는 볼펜 점검을 안하나요?’
<반응 2>
‘여기요? 볼펜 좀 바꾸어 주시겠어요?
‘여기요? 볼펜이 다 달았습니다.’
첫번째 반응은 볼펜을 관리하는 누군가의 잘못을 지적하고, 그 관리자의 소홀함 때문에 자신이 불편을 겪고 있음을 어필하는 모습이다. ‘관리자의 소홀함’이라는 성급한 심판을 포함하고 있다.
두번째 반응은 누군가의 잘못이 있는지 아닌지는 알 지 못하며, 필요한 것을 요청하거나, 현 상황을 알려주기만 하면 관리자가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보고 있는 장면이다. 심판없이 상황을 전달하거나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요청하면 들어 줄 것이라는 신뢰를 담고 있다.
최종 심판을 유보하고 구성원의 의견을 경청한 다음, 만약 그의 주장에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면 질문을 던져 의견의 취지나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경위와 전제를 새롭게 파악하면 된다. 너무 빨리 단정 지을 필요가 없다.
어떤 하나의 의견을 가지는 데는 다양한 전제들이 깔려 있다. 퍼실리테이터는 이 전제들은 짐작하거나 속단하여 ‘맞다.’ ‘틀리다.’라는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그 대신, ‘그렇게 말하는 데는 그 만한 이유가 있다.’는 가정 아래 그 주장의 근거와 조건을 살펴봐야 한다.
성급하게 심판을 내리는 것은 듣는 사람이 생명의 위험을 지켜 내려는 신속한 반사적 반응이다. 또한 자기 우월적 편견에서 비롯된 상대방에 대한 비하적인 의심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이기주의자, 기회주의자, 위선자, 게으른 자, 무책임한 자일 것이라는 의심이다. 그래서 비윤리적인 사람이라는 의심이다. 상대방의 주장을 긍정적, 우월적으로 검토하지 못하고 단정 짓게 하는 원인이 된다.
따라서 퍼실리테이터는 논의에 참여하고 있는 구성원들이 충분히 도덕적이고 긍정적인 협력자라는 시각을 잃지 않아야 한다.
이 점에 관하여 프랭크의 견해는 커다란 도움을 준다.
“views about human nature have important practical consequences. . . . [O]ur beliefs about human nature help shape human nature itself” (Frank 1988, 237).
사람을 어떤 존재로 바라보느냐는 매우 중요한 현실적 결과를 가져온다...우리가 인간의 본성을 바라보는 대로 인간의 본성 자체가 만들어진다.
<반찬 에피소드>
아버지와 아들이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하고 있다. 반찬이 맛있었는지 주문한 순두부 찌게가 나오기도 전에 두 가지 반찬을 모두 비웠다. 벽에는 ‘반찬 리필은 셀프’라고 붙어 있었다.
‘아빠는 아들에게 반찬 좀 더 가져올래?’ 하고 주문했다.
아들은 반찬 그릇 하나는 들고 일어났다.
아빠에게 옳은 것은 반찬 그릇을 두 개를 한꺼번에 들고 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 개의 반찬 그릇에 반찬을 모두를 채워 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들이 반찬 그릇을 하나만 들고 일어서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이 때 보통은 아빠가 이렇게 말한다.
‘두 개 다 가져올래?’
혹은
‘두 개 다 가져와.’
혹은
‘두 개 다 가져 와야지.’
에포케를 실천하는 아빠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반찬 그릇 하나만 드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심판하지 않은 것이다.
아들은 하나의 반찬을 가져온 후, 연달아 또 다른 반찬을 가져왔다.
반찬 그릇 하나를 들은 것이 반찬을 하나만 가져오고 말 것이라는 믿음도 성급한 심판이었다.
아들에게는 하나만 드는 것이 옳음이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양손으로 그릇을 가져가서 그릇에 반찬을 담으려면 그릇 하나를 어딘가에 올려 놓아야 하는데, 셀프바 주변에는 그릇을 놓을 적당한 자리가 없었다. 그리고 좌석과 셀프바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기 때문에 두 번 다녀오는 것이 큰 수고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그렇게 결정한 것이었다.
아빠는 두 개를 한꺼번에 가져오는 것이 효율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하나만 들었다는 것은 반찬을 하나만 가져올 것이라는 예상의 믿음도 가자고 있었다. 그것은 아빠에게 참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참을 실현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 진리의 실현을 위한 충동을 잠시 연기함으로써 일은 자연스럽게 되어 갔다. 에포케의 유용성이다.
에포케는 미리 정해진 진리나 존재는 없다는 철학적 관찰이다. 퍼실리테이터에게 주는 힌트는 중립자로서의 열린 마음이다. 워크숍에서 다루는 이슈에 대한 해답은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상황을 해석하는 것도 참여자의 몫이고, 상황을 개선하는 데 필요한 해법도 참여자의 시각으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퍼실리테이터는 편협하게 흐르지 않고 좀 더 다양한 시각에서 다루어 볼 수 있도 돕는 것이다.
2023년부터 '리더십 에포케' 교육을 개설하였습니다.
https://www.koofa.kr/courses/117
조직개발과 퍼실리테이션에 관한 정보, 유튜브 채널도 참고하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pQcfMBBI_0cPg1V4oHWxiA
조직개발과 퍼실리테이션에 관한 정보, 팟빵 채널도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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