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름, 속임, 따름, 행함, 됨의 5 단계를 살펴본다.
퍼실리테이션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있다.
퍼실리테이션을 통해서 그 동안 해결하지 못했던 어려움을 해결하는 사례를 경험하고, 그 가능성을 느끼고, 자신의 업무에 적용해 보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한편에서는 퍼실리테이션이라고 이름만 붙였지, 사실상 사람들을 괴롭히거나 조작하는 방식으로 퍼실리테이션이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다채로운 퍼실리테이션의 수행 양상으로 인하여 이를 처음 접했거나 체계적으로 배우지 않은 사람들은 혼란스럽다. 퍼실리테이션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는 것인지, 어디에 좋은 것인지 궁금하다. 이 글에서는 퍼실리테이션의 수준을 나누어 비교함으로서 퍼실리테이션이 지향하는 것과 실제로 시행되고 있는 퍼실리테이션 사이의 격차를 확인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한다.
퍼실리테이션의 효과는 퍼실리테이션에서 나온다. 퍼실리테이션이 아닌 것에서 퍼실리테이션의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그러므로 무엇이 퍼실리테이션인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그 것으로부터 기대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이 글에서 일컬어지는 퍼실리테이션은 국제퍼실리테이터협회(IAF, http://www.iaf-world.org/)의 역량 목록(https://goo.gl/BDg4SO)에 따른 퍼실리테이션을 말한다. 그러므로 집단작업(group work) 또는 회의(meeting) 퍼실리테이션에 관한 것이며, 학습(learning) 또는 훈련(training) 퍼실리테이션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학습 퍼실리테이션은 합의를 위한 갈등 상황을 다루는 일이 거의 없으며, 집단보다는 개인의 역량을 강화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 점에서 회의 퍼실리테이션과 다르다.
(참고 : 퍼실리테이션이란 집단이 집단의 공동 목적을 쉽게 달성할 수 있도록 도구와 기법을 활용하여 절차를 설계하고 중립적인 태도로 진행과정을 돕는 것을 말한다. - 구기욱)
퍼실리테이션의 수준은 다음 단계와 같이 구분할 수 있다. 사실상 퍼실리테이션이 아니지만, 스스로 퍼실리테이션이라고 부르는 사례가 실제로 많이 있기 때문에 이를 구분하여 바라볼 수 있도록 개념을 정리해 본 것이다.
1. 제1단계 - 모름(ignorance)
모름의 단계에 있는 퍼실리테이터는 퍼실리테이션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는 상태이다. 중립을 지키는 것이 무엇이며, 중립이 어떤 효과를 가져오는지 알지 못한다. 자기 스스로 퍼실리테이터라 지칭하지만, 퍼실리테이터로서의 행동을 보여주지 못한다.
이 단계에 있는 사람은 스스로 퍼실리테이션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가 진행하는 그룹워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불편함을 느낀다. 어떤 점이 다른 방식과 다르다는 것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이 단계에 있는 사람은 심지어 퍼실리테이션에 대하여 알고 싶어하지 않고 제대로 배우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단지 퍼실리테이터라는 이름이 근사하고 상업적 이득이 생길 수 있다는 점 때문에 퍼실리테이션이라는 말을 차용해서 사용하는 사람이다.
모름 단계의 퍼실리테이션 워크숍에서는 접착 메모지, 소그룹 배치, 퍼실리테이터라 칭하는 사람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진짜 퍼실리테이션과 외관이 비슷하다. 그러나 퍼실리테이터가 중립의 의미를 잘 모르며, 실제로 중립을 지키는 발언이나 행동을 해내지 못한다. 미리 정해진 방향으로 결론을 몰고 가거나 토론이 형식적, 기계적으로 흐르고, 퍼실리테이터는 토론이 깊이있게 진행되는데 있어 도움을 주지 못한다.
이견이나 갈등을 다루는 과정에서 단순히 투표를 통하여 다수결로 결정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심지어 조작을 통하여 결론을 왜곡한다. 그리고 그것은 어쩔수 없는 것이며 그렇게 하는 것도 퍼실리테이션인 것으로 안다.
2. 제2단계 - 속임(deception)
속임의 단계에 있는 퍼실리테이터는 퍼실리테이션이 무엇인지, 중립의 중요성이 무엇인지는 어느 정도 알고 있으나, 실제로 중립을 지키는 역량이 부족하여 중립을 가장하고, 중립이 아닌 것을 중립이라고 주장한다.
이 단계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이 진정한 퍼실리테이션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제대로 하는 것을 더 배우고 알고 싶어하지만 현실적 한계 때문에 아직 그에 다다르고 있지 못하다. 이는 충분히 수련을 하지 못한 상황에서 자신의 역량을 초과하는 퍼실리테이션을 맡게 되었을 때 나타나기 쉽다.
속임 단계의 퍼실리테이션 워크숍에서는 제대로된 퍼실리테이션 워크숍에서 볼 수 있는 도구와 기법들이 사용된다. 그러므로 외관상 나타나는 모습은 진짜 퍼실리테이션과 매우 닮아 있다. 그리고 이 단계의 퍼실리테이터는 어느 정도 중립을 지키면서 진행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이나, 다루기 어려운 갈등상환에서 중립을 잃게 된다. 그리고 이 상황을 중립을 지키고 퍼실리테이션의 역할을 다한 것처럼 보이도록 위장하는 노력을 행한다.
자신의 중립성을 높이려는 노력보다는 기법이나 도구의 화려함에 의존하게 되는 경향이 강하게 된다. 이는 자신의 부족함을 도구의 겉모양으로 감추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이 단계에 있는 퍼실리테이터는 중립의 가치에 대하여 좀 더 깊은 이해를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3. 제3단계 - 따름(acting)
따름 단계에 있는 퍼실리테이터는 퍼실리테이션이 무엇인지, 중립의 중요성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이를 지키고 따르는 것이 집단과 회의를 잘 돕는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이를 자연스럽게 해내고 있지 못하는 상황이다. 마치 교통법규를 잘 지키는 초보 운전자와 같다. 긴장하고 애쓰지만 충분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때로는 방해를 하기도 한다.
이 단계에 있는 사람은 퍼실리테이션을 제대로 학습하여 진정한 퍼실리테이터가 되고 싶지만 아직 몸에 익숙하지 않은 상태이다. 발전 가능성이 있지만 진정으로 집단을 도우려는 마음보다 자신이 실습하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될 경우 속임의 단계로 추락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단계에 있는 퍼실리테이터는 너무 욕심을 내어 어려운 과제에 도전하기 보다는 쉬운 과제에 적용하고, 꾸준히 전문 퍼실리테이터와 교류하여 해냄의 단계로 향해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중립의 작동 원리와 효과를 이해하고 있는 단계이므로 실제로 현장에서 익숙하게 구현할 수 있도록 참관과 실습을 멈추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성찰적인 피드백을 통하여 자신의 부족한 행동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이를 개선해 나가는데 집중하는 것이 좋다.
4. 제4단계 - 해냄(doing)
해냄 단계에 있는 퍼실리테이터는 퍼실리테이션이 무엇인지, 중립의 중요성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으며, 이미 여러차례의 성공적인 퍼실리테이션을 경험한 사람이다. 중립을 잘 지키고, 다양한 기법과 도구를 사용하여 집단과 회의를 도운 경험을 통하여 퍼실리테이션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있으며, 능숙함이 높아진 단계이다. 경험이 있는 분야와 사례에 대하여 자신감을 지니고 있으며, 참여자는 일반회의에서 느끼지 못했던 다른 방식의 참여의 즐거움을 느낀다.
이 단계에 있는 사람은 직업적으로 퍼실리테이션을 수행할 수 있으며, 집단의 문제를 잘 해결하여 고객으로부터 고맙다는 인사를 듣게 된다. 퍼실리테이션이 성공했을 때, 진정으로 집단을 돕고 그들의 잠재력을 발휘하게 했다는 점에 내면의 깊은 즐거움과 자부심을 맛보기도 한다. 이러한 성공적인 수행은 타인으로 하여금 퍼실리테이션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만든다.
아직 부족한 부분은 실제의 삶과 일에서의 퍼실리테이션에 어긋남이 있는 것이다. 퍼실리테이션 워크숍의 상황으로 짜여진 경우에 중립을 지키면서 퍼실리테이션을 수행하는 것은 잘 해내지만, 자기 자신의 일, 사적인 관계에서는 중립성을 잃는 경우가 종종 생겨난다.
그러므로 퍼실리테이터로서 이중적인 삶의 양식에서 오는 내면의 갈등이 있으며, 이에 관하여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이 단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시야를 보다 넓히고, 성취, 승리, 중립과 같은 수단적이고 단기적인 가치보다는 평화, 행복과 같은 장기적이고 종국적인 가치에 집중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5. 제5단계 - 됨(being)
퍼실리테이션이 자연스러워진 상태이다. 퍼실리테이터는 삶과 일에서 일치된 행동을 보이며, 중립자로서의 행동에 거리낌이 없다. 퍼실리테이터로서 도구와 기법에 억메이지 않고 집단으로부터 자연스런 대화를 이끌어내며, 회의의 참여자는 편안하고 자연스런 상태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니게 된다.
이 단계에 있는 퍼실리테이터는 다른 퍼실리테이터에게 귀감이 되며 진정한 퍼실리테이터 양성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퍼실리테이션의 성공적인 사례를 쌓아감으로서 퍼실리테이션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적용의 확산을 불러일으킨다. 사람들은 이 단계의 퍼실리테이터는 만나는 것 만으로도 배움과 성찰을 얻고 퍼실리테이션에 대한 더 깊은 매력을 느끼게 된다.
퍼실리테이션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시도가 이루어지며, 이 시도는 새로운 도구와 기법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단계의 퍼실리테이터는 퍼실리테이터에 대한 지나친 확신을 가지는 것을 주의하고, 도그마에 빠질 위험을 생각해야 한다. 다른 영역의 활동을 존중하고 협업과 장기적인 발전에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필요하다.
이 퍼실리테이션의 발전 단계는 순차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수행하는 퍼실리테이션 워크숍의 난이도에 따라 단계가 중복되거나 겹쳐서 나타날 수도 있다.
이 단계는 필자가 오랜 기간 퍼실리테이션의 관찰과 경험을 바탕으로 편의상 구분지어 본 것이다. 아직 학술적 검증을 거치지 않은 것임을 밝힌다. 그러므로 자신의 퍼실리테이션 경험을 비추어 어느 단계에 있는지는 체크해 보고 어느 것에 주력하는 것이 좋을지를 재미삼아 가늠해보는 참고틀로 활용해 보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