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by 이상역

내 고향은 충북 진천이다. 고향은 마을회관을 중심으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회관 옆에는 작은 텃밭이 있는데 음달 마을에 살던 시절 어머니가 가꾸던 것이다.


그 마을회관과 텃밭 사이에 볼록하게 솟아오른 바위는 유년 시절 친구들과 정답게 뛰어놀던 놀이터다. 내가 사는 곳에서 고향까지는 차로 시간 반 정도 거리다.


가끔 고향을 찾아가지만 특별하게 기억될 만한 자리는 그리 많지가 않다. 내 고향은 이육사의 ‘청포도’처럼 이 마을 저 마을의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는 아름다운 곳도 아니요, 칠월의 푸른 청포도가 알알이 익어가는 곳도 아니다.


내가 고향을 찾아가는 목적은 남들과 대동소이하다. 그저 명절이나 아버지 기제나 어머니 생신 때다. 그리고 직장의 일로 고향 근처를 지나갈 때 한번 들러보는 정도다.


고향에 간다고 나를 기다리거나 가슴을 애태우게 하는 것은 없지만, 막상 고향의 푸른 산천을 대하면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무언가를 만날 것이란 기대감에 가벼운 흥분과 설렘이 인다.


고향은 하늘과 땅이 맞닿은 산세에 다 쓰러져가는 집만이 마을을 지킨다. 고향에는 유명한 것이 없어서 찾아오는 사람도 별로 없다. 고향을 찾아오는 사람이라야 고향을 등지고 떠난 사람만이 다시 찾아올 뿐이다.


고향을 품에 안고 사는 사람은 고향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을 느끼지 못하지만, 고향을 등진 사람은 고향이란 말만 들어도 가슴을 설레게 한다. TV에서 고향 소식이나 노래방에 가서 고향과 관련한 노래만 들어도 시선은 저절로 고향으로 향한다.


고향에는 수려한 강이나 높은 산이 없고 밋밋한 길상산이 병풍처럼 마을을 휘감은 궁벽한 곳이다. 그런 곳이 고향이라지만 찾아갈 때마다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렇다고 그것이 딱히 어떤 것이라고 꼭 집어 이야기할 것은 없다. 고향을 드나들 때면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가슴 가득 차오르는 포만감에 고향을 더 찾아가게 한다.


고향의 입구에 들어서면 늘 변하지 않고 반겨주는 것들이 있다. 언제나 든든하게 제자리를 지키는 시냇가의 느티나무와 조상의 이름과 전설이 새겨진 비석과 콘크리트에 짓눌린 구부정한 오솔길이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마을을 관통해서 흐르는 시냇물과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군무를 추는 산자락의 나무들이다. 그들을 바라보면 가슴속에는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이 순서 없이 뒤섞인다.


반겨주는 이가 없어도 고향에 가면 과거와 오늘을 여행할 수 있어 좋다. 고향 땅을 밟으면 문득 잊고 있었던 지난 일들이 밀물처럼 가슴에 파고들고 지나간 옛것이 그리워진다.


그렇게 고향에서 과거로 가는 여행을 마치고 현실로 돌아오면 어머니가 피운 구수한 연기가 계곡을 타고 내려오며 나를 배웅해 준다.


고향을 등지고 마을의 언덕길을 내려올 때면 오솔길 옆에서는 왁자지껄한 개구리울음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교향곡을 울리며 이별을 애달파한다.


고향이 든든한 힘이 되어 주는 것은 부모님의 존재와 형제들의 믿음과 주변의 것이다. 고향은 어머니의 따뜻한 품속과도 같다. 그 품속에 안기면 마음이 아늑해지고 주변의 따스한 기온이 온몸을 감싼다.


그런 감촉과 가슴을 뜨겁게 달구는 온도가 고향을 더 못 잊게 한다. 고향을 가슴에 품은 사람은 마음이 넉넉하고 여유롭다. 반대로 찾아갈 고향을 잃은 사람은 외롭고 고독하다.


언젠가 부모님 농사일을 도와드리고 느지막이 보금자리로 되돌아오려고 고향의 동구를 막 내려설 때다. 고향의 한적한 길에서 차의 전조등만이 오롯이 사위를 밝히고 있었다.


그날은 모내기가 늦게 끝나서 저녁을 먹고 내가 사는 집에 가기 위해 비석거리를 내려서는데 차창 밖에서 풀벌레 소리와 ‘개굴개굴’하는 개구리의 울음소리가 하모니를 이루며 차 안으로 밀물처럼 밀려왔다.


정말로 오랜만에 개구리와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옛 추억의 진한 향수를 맛보았다. 개구리는 어릴 적 친구이자 동무들이다.


길가의 논에서 개구리가 울어대고 산골짜기 계곡에선 뻐꾸기가 ‘뻐꾹뻐꾹’ 하며 울던 정겨운 소리를 오래 듣고 싶어 차를 멈추었다. 그리고는 차의 앞뒤 창문을 모두 내리고 아름다운 교향곡을 눈과 마음을 열고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음미했다.


고향에는 어머니가 홀로 자식을 앞세워 농사를 짓고 계신다. 어머니는 고향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실까. 이팔청춘에 강촌으로 시집을 오셔서 둥지를 튼 지 근 60년이 넘으셨다.


그 세월에 자식을 키우고 가르치고 출가시키고 하다 보니 어느덧 삶의 무게가 저쪽을 향해 기울어 간다. 어머니 피부에는 깊은 골이 새겨졌고, 환하게 웃던 얼굴에는 세월에 지친 모습이 나를 서글프게 한다.


고향은 외롭고 고독해질 때 더욱 간절하게 생각난다. 몸은 세월에 무뎌져 흐느적거리고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잃어갈 때쯤 고향을 찾아 나선다.


세월이 아무리 험하게 변해도 사회에 어둠이 가득해도 고향만 떠올리면 마음이 밝아지고 가슴 한구석에는 그리움이란 샘물이 솟아오른다. 고향이 유명하지는 않지만,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징검다리다.

세월의 나이테가 더해갈수록 앞으로 살아갈 방향보다는 지나간 시절을 더 그리워하는 것 같다. 나이라는 사슬은 태어난 시간에서 멀어질수록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가려는 탄성력이 강하게 작용하나 보다.


비록 오늘도 타향에서 거친 눈보라와 비바람을 맞으며 살아가는 신세지만, 가슴에는 고향이란 화수분을 껴안고 물레방아와 같은 삶을 살게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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