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 몸을 맡기다

by 이상역

오늘 일행과 머무를 곳은 퀸스타운 시내에서 약간 떨어진 산자락 언덕에 자리 잡은 헤리트 에이지 호텔이다. 호텔에 들어가는데 가이드가 모처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여유의 시간을 주었다.


이곳에 와서 처음 갖는 자유다. 단체여행에서 자유란 구속된 자유지만 일행을 떠나 홀로 무언가를 구경할 수 있는 시간이다. 저녁을 먹기 전까지 이곳의 자연과 풍경을 마음껏 구경하란다.


호텔에 들어오면서 이것저것 둘러보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고풍스럽고 편안하다. 이곳은 카펫 문화가 꽤 발달한 듯하다. 호텔 복도에 카펫이 깔려 있는데 상태가 깔끔하다.


호텔에 들어와도 냄새가 나지 않아 좋다. 호텔 침대에 걸터앉아 리모컨을 들고 TV를 켜자 알아들을 수 없는 ’웅웅‘거리는 소리와 ’깔깔깔‘ 대며 웃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귀를 간질거린다.


TV를 끄고 일어나 호텔 창가로 가서 밖을 내다보니 퀸스타운 하늘에 하얀 구름이 차차 벗겨지면서 파란색 하늘이 서서히 드러난다. 호숫가 옆 언덕에 고즈넉이 자리 잡은 호텔이 숲과 어울려 아담하다.


호텔에서 잠시 쉬었다가 일행과 호텔 근처의 호숫가를 거닐었다. 지금 이곳은 벚꽃이 활짝 피었다. 피부로 느껴지는 온도는 초봄이다. 남극의 호숫가를 방랑자가 되어 배회했다. 태고의 전설을 간직한 호숫가를 거닐며 콧노래를 흥얼거리자 시심이 저절로 생겨난다.


저 멀리 검은 숲에서 불어와

미지를 향해 밀려가는 바람의 무리


잔잔한 호수에 잔물결을 남기며

계절을 이끄는 무언의 힘


한적한 길에서 만난 남극의 여인

눈에 익지 않은 얼굴이다.


산자락과 호수를 품어 안은 도시의 풍경

빈 들녘으로 홀씨 되어 날아가는 민들레


어깨에 바랑 하나 둘러메고

이산 저산 떠도는

집시의 삶이 그립다.


일행과 잠시 떨어져 큰소리로 노래를 불러 보았다. 이곳은 노래를 아무리 불러도 멀리 퍼져 가지를 않는다. 지나간 시절의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며 호숫가를 거니는 나그네의 마음. 이 마음을 그 누가 알아줄까.


하늘을 나는 새처럼 상상의 나래를 활짝 펴고 호숫가를 거닐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을 잠시 떠나 지나가는 과객이 되어 바람 따라 구름 따라 정처 없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녔다.


삶의 둥지를 일탈해 낯선 곳으로 떠나는 것은 나그네에게 바람을 실어주는 격이다. 몸이 움직이는 대로 바람에 이끌려 부평초처럼 퀸스타운의 시내와 호숫가를 옷깃을 세우고 산책했다.


호숫가에서 자유로운 시간을 즐기고 저녁에는 남섬의 퀸스타운에서 밤의 야경을 제대로 구경할 수 있는 산상의 라운지로 올라갔다. 호텔에서 택시를 타고 약 십여 분간 이동해서 곤돌라를 타고 산 정상에 올라가 이 세상에 태어나 가장 멋진 저녁 식사를 즐겼다.


북반구의 구름과 바람을 타고 내려와 다시 남반구의 구름과 바람을 타고 올라가야 하는 운명 앞에 마주한 삶. 사람으로 태어나서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한 삶인지를 근본적으로 생각하게 한 날이다.


산 정상에 올라가 뉴질랜드에서 생산되는 신선한 채소와 육류를 먹고 키위로 만든 와인을 곁들여 마시면서 뉴질랜드의 풍요로움과 맛과 멋에 대한 낭만을 맛깔스럽게 음미하며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마치고 곤돌라를 타고 내려오는데 시계가 21:30을 가리켰다. 곤돌라에서 서녘 하늘을 바라보니 백야 현상으로 훤하게 빛나고 있었다. 올해 맞이한 봄날을 다시 남반구에 내려와 맞이하니 마음이 따뜻하고 풍성하다. 게다가 저녁 식사까지 맛깔스럽게 먹고 나자 세상의 온갖 것을 누리며 산다는 생각이 든다.


뉴질랜드 특유의 감미로운 음악을 들으며 키위로 만든 와인을 기울이는 고독한 여행자. 산 정상에서 바라본 자연의 무변광대함과 하얀 눈을 머리에 인 만년설이 오늘을 더욱 뜻깊게 해 주었다.


산상에서 포만감이 가득한 저녁을 먹고 나자 바쁠 것도 쫓기는 것도 없는 여유로움이 몸에서 배어난다. 나도 이들처럼 여유롭게 행동하는 것 같은데 왠지 모르게 서투르고 어설프기만 하다.


지금은 호텔에서 라디오를 틀어놓고 비망록을 끄적거리는 중이다. 이렇게 호텔 방에 오도카니 앉아 무언가를 끄적거리는 여행에 푹 빠져보고 싶다. 삶의 근원을 찾아가는 여행에서 무한한 상상과 고독한 영혼과 대화를 통해 본래의 나를 알아가는 여정이 그립기만 하다.


뉴질랜드인은 아름다운 강산을 조상에게 물려받아 대대로 풍요로운 삶을 누린다는 생각이 든다. 이들의 풍요로움과 한가로움이 부럽다. 이 밤은 나를 더욱 고독하고 외롭게만 한다.


이국의 이름 모를 가수의 유장한 노랫소리도 그렇고 조용한 방에서 외롭게 떠도는 고독한 기운이 외로움을 배가시킨다. 이곳 뉴질랜드 남섬에서 아름다운 호숫가를 거닐면서 세상과 일 년 정도 단절하고 지내고 싶다.


길가에서 자라는 나무는 땅이 비옥해 보이지 않는데도 나뭇가지가 무성하게 자란다. 나뭇가지와 겉껍질은 소나무를 닮았는데 잎은 측백나무와 비슷하다. 분명 소나무인데 소나무가 아닌 모습이다.


나무들이 자라는 모습이 우리가 그간 보아왔던 것과 상당히 다른 형태다. 나뭇가지는 대개 하늘을 향해 45° 각도로 자라며 올라가는데 이곳은 나뭇가지가 땅을 향해 활처럼 구부정하게 휘어졌다가 반원을 그리며 하늘을 향해 올라간다.


뉴질랜드 남섬에서 단체 여행의 재미를 톡톡하게 누리고 있다. 일행과 호텔 로비에 앉아 그간 살아온 이야기를 오래도록 나누었다. 여행은 견문을 넓혀준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이국적인 자연의 풍경만 바라봐도 견문이 넓어지지만, 다른 사람과 말을 나누어도 견문이 넓어진다.


여행은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밟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견문이 넓어지는 것 같다. 퀸스타운 산 정상에서 저녁을 먹는데 우리 옆 테이블에는 일본인들이 식사하고 있었다. 지구상에 우리처럼 떠도는 사람이 도대체 얼마나 될까. 뉴질랜드에서 자주 만난 사람은 중국인과 일본인 그리고 한국인이다.


산자락 언덕에 자리 잡은 호텔과 그 옆 호수를 바라보자 유럽의 로렐라이 언덕이 떠오른다. 전설이 전설을 만드는 호수의 풍경을 바라보며 그 전설 속에 빠져들게 하는 밤이다.


이름 모를 산을 유유히 넘어가는 구름과 남극의 뭇별들을 바라보는 이국의 낯선 밤. 이번 여행을 마치고 가족들과 함께 다시 이곳에 와서 여행하고 싶게 만드는 밤이다.


이곳의 호텔은 따뜻하고 편안하다. 이국을 찾아온 마음의 호사 때문일까. 오늘 저녁에 느낀 풍성함과 따뜻한 기운을 가슴속에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다.


내일은 다시 새로운 곳을 찾아가야 하는 여정이 기다린다. 오늘은 이만 상상의 나래를 접고 꿈나라로 또 다른 여행이나 떠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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