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돈이든 마음의 부담이든 남에게 빚지는 것이 싫다. 타인에게 갚을 빚이 조금만 있어도 그것을 갚지 않으면 마음이 불안할 정도다.
요즈음 직장에서 사람이나 은행에 빚진 것도 없는데 동료들에게 자주 듣는 말이 있다. 어쩌다 사무실 복도에서 동료를 만나면 “왜 요즘 업무망에 글을 올리지 않느냐.”라는 소리를 종종 듣게 된다.
동료에게 그런 말을 들으면 마치 내가 동료에게 빚을 진 것처럼 마음이 무거워진다. 직장의 업무망에 종종 글을 써서 올리고 있는데 그 글을 읽어본 사람이 꽤 되는 것 같다.
그 덕분에 얼굴보다 이름을 알리는 통로가 되어간다. 동료에게 “왜 글을 쓰지 않느냐?”라는 말을 들으면 마치 빛 독촉장을 받아 든 기분이 든다.
사람은 자기가 좋아서 하는 것은 시간이나 마음에 휘둘림이 없어야 한다. 단순 반복적인 일도 인내를 통해 기쁨과 보람을 얻듯이 몸이란 그릇도 감정을 채우려면 적당한 시간과 기다림이 필요하다.
업무망에 글을 올리다 보니 직장에서 얼굴을 모르던 동료도 업무적인 일로 만나 서로 통성명을 나누면 “아! 그분이세요?”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리고는 친하게 알고 지내던 동료처럼 반갑게 맞아준다.
글이란 기호를 통해 이름을 알아주는 것은 즐겁고 고마운 일이다. 글이나 그림을 통한 만남에는 마음의 교감을 사전에 나누었다는 익숙한 시선이 전제한다.
누군가의 글을 읽거나 그림을 본 것은 그 사람과 마음을 나누었다는 교감 덕분에 소통도 빠르고 감정을 공유했다는 공감대에 친밀도도 높아진다.
직장의 업무망에 올린 글로 인해 얼굴보다 이름이 알려지는 현실이 조금은 부끄럽다. 글을 쓰는 전업 작가도 아닌데 솜씨 없는 글로 칭찬을 받으니 마음 둘 곳을 모르겠다.
글을 쓰다 보면 마음은 물처럼 낮은 곳으로 임하게 한다. 글을 쓰면서 종종 마음이 낮은 곳을 향해 가면 텅 비어 가는 마음과 생명의 원초적인 근원을 만나기도 한다.
그렇게 나를 무한히 낮추는 마음의 여정에서 자신을 사랑하는 진실함을 발견하고, 마음의 정화작용을 통해 가슴이 시원해지고 머리가 맑아지는 참되고 진실한 맛을 본다.
글은 사람의 잠재된 마음을 기호로 그려내는 일이다. 그런데 마음을 기호로 그려내는 것이 입에서 나오는 말처럼 그리 쉽지만은 않다.
머릿속에 생각을 정제하지 않고 떠오르는 것을 그대로 적는 것은 글이 아니라 날것 그대로의 생각이다. 글은 이런저런 생각과 마음속에 침잠한 오감을 통해 보고 듣고 읽은 것을 모아 수채화로 그려내는 일이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시간과 장소에 구애를 받지 않고 아무 때나 그림을 그릴 수 없듯이 글도 시간과 장소와 마음의 준비 없이 아무 때나 쓸 수는 없다.
최근 감정이 고갈된 상태에서 책상에 앉으면 머릿속이 멍하고 캄캄해진다. 무언가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싶어도 간절한 마음만 앞설 뿐 대상에 몰입해서 빠져들지를 못한다.
길을 걸어가며 떨어지는 나뭇잎을 바라보아도, 아름답고 흥겨운 노래를 들어도 감정이 일지를 않는다. 시상이 떠올라야 시를 그려나가듯이 글도 감정과 감흥이 일어야 마음의 스케치를 시작한다.
내 머릿속의 생각을 무뎌지게 하는 것은 일 때문도 시간이 부족해서도 아니다. 그저 조용하게 앉아 사유할 수 있는 시간과 마음의 집중이 부족해서다.
누군가 뒤에서 나를 채근하거나 붙잡는 것도 없는데 한없이 늘어져 가는 마음과 생각할 틈이 없이 나를 바쁘게 몰아가는 시간이 원인인 것 같다.
직장에 출근하며 바라보는 가로수의 나뭇잎이 아름답기만 하다. 온갖 비바람과 풍파를 이겨내고 멋진 단풍을 쏟아내는 나무가 나 보다 아름다운 삶을 산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나무를 바라볼 때마다 부끄럽고 시샘하는 마음만 생겨난다. 가로수가 붓 가는 대로 자연을 스케치하는 아름다운 모습처럼 나도 글이란 대상을 향해 오롯이 정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일상의 잡다한 생각을 가라앉히고 글이란 세상과 마주하는 삶에 폭 빠져보고 싶다. 그런 세상을 유유자적하며 生과 死의 원형질을 고민하는 내밀한 삶을 살아가고 싶다.
이 글이 가고자 하는 목적지는 알 수 없지만, 글을 쓰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휘둘리면 가야 할 방향을 잃는다. 머릿속에 든 단어와 문장을 여백에 토해내며 목숨이 경각에 달린 듯이 마음만 서두를 뿐이다.
아름답고 멋진 글을 잔잔하게 풀어내는 사람이 부럽다. 문장과 문장을 잇기 위해 머릿속의 단어를 끄집어내는 것이 마치 열두 고개를 넘어가듯이 머리가 무거워지고 마음이 답답하다.
텅 빈 여백에 생각의 실타래를 술술 풀어내는 운명 앞에 마주하고 싶다. 처음 글을 쓰고자 했던 초심이 그립다. 연필에 침을 발라가며 하나둘 떠오르는 기억과 생각을 스케치하는 멋진 삶을 살고 싶다.
더해서 글이란 기호에 영혼을 불어넣어 멋진 활자로 변신하는 신비스러움과 그 기호를 통해 맑은 마음이 우러나는 성스러운 기운을 오래도록 느껴보고 싶다.
지금 내 마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듯이 이 글도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마무리를 해야 할 것인지 방향성을 모르겠다.
글을 써보고자 마음을 먹으면 매번 부딪치는 일이다. 낙엽이 바람 따라 자연스럽게 둥치 주변을 여행하다 일생을 마치듯이 이 글도 종이라는 캔버스를 자유롭게 여행하다 자신의 생을 마감하기 바란다.
오늘도 글이란 무한의 바다를 열기 위해 대문을 두드려 보았지만, 대문은 제대로 열지 못한 채 문전만 서성이며 여백에 불필요한 사선만 그려댄 것 같다.
미래의 언젠가는 글이란 바다의 대문을 활짝 열어젖힐 날이 찾아오겠지만 지금처럼 마음의 넋두리를 여백에 그리면서 무언가를 써본다는 일이 그저 즐겁고 기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