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원의 아침

by 이상역

거리의 가로등이 적막한 밤의 종말을 고하며 낮을 배설하는 새벽녘. 내 앞에서 두 어깨에 배낭을 걸친 할머니가 공원의 오솔길을 자박자박 걸어간다.


할머니가 걸어가는 뒷모습에서 삶의 희로애락과 등에 무언가를 짊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생의 고단함이 엿보인다. 나이가 들어 등이 앞으로 굽어지자 몸의 무게 중심을 잡아보려고 배낭을 짊어진 것 같다.


발자국을 내디딜 때마다 밭은 숨소리는 가빠지고, 빈 몸으로 움직이는 것도 버거운데 더부살이 하나를 더 얹어야만 마음이 놓이는 삶.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굽어진 등위로는 세상의 험한 풍파를 겪은 삶의 낮과 밤이 부평초처럼 부유한다.


공원 옆 도로에서 손님이 없는 버스를 운전하며 외길만을 순환하는 마을버스. 운전기사는 손님이 없는 외로움을 달래고자 새벽부터 잠이 덜 깬 버스의 페달을 사정없이 밟아댄다. 버스에서 거칠게 풍겨 오는 경유 냄새와 옆에서 걸어가는 아주머니의 분 냄새가 후각을 자극하자 정신이 혼미해진다.


컴컴한 도로에서 빨간색 후미 등을 켜고 어디론가 바쁘게 달려가는 차들과 학교 건물에서 비둘기가 구구 거리며 새벽의 미명을 깨운다. 녹색 잔디는 계절 따라 갈색의 빛을 향해 생명의 의지를 잃어가고, 공원은 시민을 맞이하기 위해 분장을 하는 중이다.


가설무대가 설치되고 유목민의 상징인 이글루가 뾰족탑의 어깨를 맞대고 하늘을 향해 자웅을 겨룬다. 따뜻한 온실에서 자라던 노란 국화는 바깥의 차가운 기운이 싫은지 비닐을 뒤집어쓴 채 자신의 명함을 조용히 내민다.


주변의 빌딩 숲과 어울려 생명을 낳고 물상을 맞이하는 공원. 공원에 다양한 형태의 생물이 존재하는 것처럼 사람들도 다양한 모습으로 동이 터오는 새벽을 맞이한다.


하나둘 구령을 부쳐가며 체조하는 사람, 세 명이 한 조가 되어 배드민턴을 치는 사람, 서로 편을 갈라 게이트볼을 치는 사람, 나무둥치에 몸을 부딪치며 운동하는 사람이 저마다의 아침을 맞는다.


컴컴하던 사위가 가로등의 점멸과 함께 힘을 잃으면 대지는 서서히 태양의 빛을 받으며 밝아지기 시작한다. 어둠은 낮과 생명의 활동을 낳는다. 밤이 낮은 데서 온다면 낮은 높은 데서 온다. 하늘 높이 떠 있는 구름에 붉은 기운이 엷게 비치면 어두운 밤은 소리 없이 사라지고 본격적인 낮의 사위가 작동한다.


마치 계절을 이끄는 자연의 모습과도 같다. 봄이 남에서 북으로 불어 가는 바람이라면, 가을은 북에서 남으로 내려오는 바람이다. 단풍이 산 정상에서 산 아래를 향해 내달리듯 낮도 높은 구름에서 태어나 지구를 향해 사정없이 내달린다.


가을은 풍요로운 계절이다. 공원은 밤에 많은 것을 잉태시켜 고스란히 낮에 물려준다. 뻔뻔한 비둘기가 눈치를 보아가며 사람을 비키지 않듯이 밤도 제 자리 내어주기를 싫어한다. 가로등에 의해 강제로 빼앗긴 밤손님은 갈 길을 잃은 채 순환하는 마을버스를 따라 길 가장자리를 서성인다.


비둘기는 나무와 숲을 찾아가는 것이 나은 삶인데도 사람이 토해낸 배설물을 좋아한다. 새가 사람에게 의지할수록 몸이 약해지는 것은, 자연의 이치인데 비둘기는 이를 깨닫지 못한다.


밤을 잃은 공원의 벤치에는 간밤에 청춘이 남긴 세상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세상살이가 너무 고달픈지 지난밤에 애써 먹은 것을 배설해 놓았다. 세상은 무언가를 배설하면 할수록 힘들다는 것을 그네들은 모르는 것 같다. 아무리 많은 것을 밖으로 배설해도 세상은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은 왜 모를까.


어쩌면 세상을 향해 삿대질하고 욕하고 더럽다고 소리치는 것은 사람밖에 없다. 고양이도 배설물을 가리고 욕을 하면 피하는데 사람만이 욕을 하면 할수록 바락바락 대든다.


밤은 좋고 나쁜 것을 가리지 못하지만 낮은 醜美를 가리는 잣대를 들고 거침없이 다가오는 낯선 손님이다. 밤은 깊어갈수록 추한 것을 품어 안는 다지만 낮은 밝아질수록 추한 것을 드러내는 것이 세상살이의 이치다.


공원 입구에서 만난 할머니가 등에 걸친 배낭의 깊은 속뜻은 알 수 없지만, 배낭에는 분명 밤과 낮을 가리는 인생의 연륜이 들어있을 것이다.


어둠이 사라지고 새벽이 밝아오자 공원을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동안 도로에서 헛손질만 하던 마을버스도 사람을 하나둘 태우고 바쁜 길손을 서두른다. 공원 옆 시청 건물에는 세월을 측정하는 빨간 물감이 빛을 발하며 깜빡깜빡 인사를 건넨다.


가을을 맞이하는 공원은 색동옷으로 갈아입기 위해 바쁘기만 하다. 태양이 지구를 향해 거침없이 얼굴을 내밀자 공원을 서성거리던 사람들이 어딘가로 사라졌다. 나도 밤이 흘린 낮을 주워 들고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가을날 아침에 공원을 산책하면 고독이 깊어만 간다. 가을은 사색의 계절이라더니 맞는 말 같다.


공원에서 가볍게 산책을 마치고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자 가슴이 활짝 기지개를 켠다. 공원을 빠져나와 오솔길로 들어서자 느티나무 위에 앉은 까치가 반갑다며 인사를 건네는 상쾌한 가을날의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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