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냄새

by 이상역

탄천의 성남 방향 천변을 걸어가다 서울과 경기도 경계점에 이르자 풀냄새가 후각을 강하게 자극해 온다. 어제 아침에만 해도 풀을 베지 않았는데 누군가 예초기로 풀을 싹둑 베어냈다.


천변에 무더기로 자라는 풀은 예초기로 잘라 낼 때마다 풀냄새가 진동을 한다. 마치 봄에 보리를 베고 난 후 전해오는 풋풋한 보리 내음과 가을에 낫으로 벼를 베고 나서 나는 구수한 냄새와 비슷하다.


아침에 풀냄새를 맡으며 천변을 터벅터벅 걸어가자 머릿속에 ‘푸른 잔디’라는 동요가 떠올라 콧노래로 흥얼거려 본다.


풀냄새 피어나는 잔디에 누워

새파란 하늘가 흰 구름 보면

가슴이 저절로 부풀어 올라

즐거워 즐거워 노래 불러요.(유호 작사/ 한용희 작곡, 푸른 잔디)


‘푸른 잔디’는 시골에서 소와 함께 서낭당 언덕에 올라가 소고삐를 놓아주고 넓적한 바위에 드러누워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부르던 동요다.


넓적한 바위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면 새파란 하늘이 끝없이 펼쳐지고 아득한 하늘에 뭉게구름이 두둥실 떠 가고, 그 구름을 따라 산자락에서 실바람이 불어오면 가슴이 한없이 부풀어 올랐다.


‘푸른 잔디’란 동요를 목청껏 부르면서 하늘을 올려다보면 세상의 모든 것이 가슴으로 들어왔다. 올해도 봄꽃이 피었다가 지는가 싶더니 어느덧 오월 중순에 다다랐다.


이른 봄부터 자란 풀은 이맘때쯤 한번 잘라주어야 한다. 장지천과 탄천에 무성하게 자란 풀들은 누군가가 예초기로 구역을 정해서 베어내고 있다.


그때마다 풀냄새가 후각을 강하게 자극해 온다. 아침에 풀냄새를 맡으며 천변을 터벅터벅 걷다 보면 지난 시절의 아련한 추억이 생각난다.


지금은 농기구와 제초제가 발달해서 그런지 논두렁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고 농사를 짓는다. 아버지가 농사를 짓던 시절에 벼농사는 다른 어떤 농사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따라서 논의 논두렁을 깨끗하게 관리하지 않으면 남들에게 지청구를 받았다. 논두렁에 풀이 수북하게 올라오면 지게에 낫과 숫돌을 얹어 어깨에 지고 논에 가면 아버지는 제일 먼저 숫돌을 세워 놓고 낫을 갈았다.


논두렁 풀은 낫이 잘 들어야 베기가 수월하다. 낫이 잘 들지 않으면 풀이 뿌리째 뽑혀 나와 낫질을 제대로 할 수 없다. 아버지는 낫을 한 번에 네 자루를 갈아놓고 담배 한 개비를 꺼내 피우시고는 논두렁에 들어갔다.


논두렁은 앞과 뒤를 깎아 주어야 한다. 앞 두렁은 좁고 두렁콩을 심어서 베기가 까다롭고 뒤 두렁은 신발을 벗고 논에 들어가서 깎아야 한다. 나는 앞 두렁을 깎고 아버지는 뒤 두렁을 깎았다.


앞 두렁은 무릎을 쪼그리고 앉아 풀을 베어야 한다. 무릎을 잔뜩 쪼그리고 앉아 오리걸음 해가며 풀을 베다 보면 무릎이 저려온다. 그럴 때마다 일어서서 무릎을 펴주고 혈액을 순화시켜 주어야 한다.


앞 두렁에 쪼그리고 앉아 낫을 들고 풀을 ‘사각사각’, ‘쓱쓱’ 베고 있으면 풀냄새와 시큼한 논 냄새가 코로 훅하고 들어왔다. 그렇게 좁은 두렁에 쪼그리고 앉아 온갖 냄새에 취해 풀을 베다 보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그 시절 다랑논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었고 계단식 논이라서 풀을 깎는 양도 두렁도 많았다. 온몸에 땀을 흘려가며 논두렁에 앉아 풀냄새와 흙냄새와 벼냄새를 맡으며 풀을 베던 추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논두렁 풀을 베며 코로 전해져 오는 풀냄새와 벼냄새를 맡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논두렁 풀을 베며 소가 먹기에 좋은 풀은 별도로 모아두고 나중에 일이 끝나면 지게에 지고 갔다.


어스름한 저녁의 석양빛을 받으며 지게를 지고 집으로 고단하게 올라가던 시절이 오월이면 머릿속에 아련하게 떠오른다.


유년 시절 뒷동산에 올라가서 푸른 잔디에 누워 바라보던 뭉게구름과 새파란 하늘.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성장하던 시절의 풀냄새와 아버지와 함께 논두렁 풀을 베면서 맡았던 풀냄새와 벼냄새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의 강이 되어 버렸다.


탄천의 천변을 걸어가면서 풀냄새가 올라올 때마다 지난 시절에 맡았던 풀냄새가 겹쳐져 발걸음을 내딛지 못하게 막아선다. 그런 아련함에 젖어 ‘푸른 잔디’ 동요를 콧노래로 다시 한번 흥얼거려 본다.


‘풀냄새 피어나는 잔디에 누워 새파란 하늘가 흰 구름 보면 가슴이 저절로 부풀어 올라 즐거워 즐거워 노래 불러요’. 이 동요는 반복해서 부를수록 가슴이 팽팽해지고 마음을 맑게 한다.


이 동요의 특징은 한번 부르면 서너 번은 내쳐 불러야 속이 후련하고 가슴이 뻥 뚫린다.


오늘은 모처럼 천변에서 풀냄새를 맡으며 지난 시절 아버지와 함께 논두렁을 깎던 추억과 ‘푸른 잔디’라는 동요를 부르던 동심의 세계에 빠져 보았다.


지난 시절 풀냄새가 추억과 그리움을 품게 해 주었다면 앞으로는 풀냄새가 아닌 사람의 냄새를 추억하고 그리워하는 소소한 삶을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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