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 편지

by 이상역

시골촌놈이 서울에 올라와 어쩌다 아내를 만나 결혼해서 살다 보니 가족이 하나둘 늘었다. 그 아이들이 성장해서 큰아이는 고등학교 2학년, 작은 아이는 중학교 2학년이다.


누구나 자식을 어떻게 얻고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아왔느냐고 물으면, 아마도 밤을 새워 대화해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나도 이런저런 것을 겪는 과정에서 두 아이를 가슴에 품게 되었다.


큰아이는 아내보다 내가 먼저 가슴에 안았다. 세상에 태어나 황달 치료를 받기 위해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서 중구 을지병원까지 앰뷸런스를 타고 가면 서다.


나는 그때 생애 처음으로 세상에 갓 태어난 아이를 가슴에 안았다. 갓난아기는 태어나면 잠만 잔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큰아이는 그러지를 않았다.


내 품속에서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고 비틀어가면서 차창 밖으로 연신 고개를 돌려가며 바라보는 아이의 눈동자가 앙증맞게 다가왔다. 중앙차선을 넘나들며 달리는 응급차에 몸을 여기저기 부딪치면서 아이를 가슴에 꼭 끌어안고 기쁨과 희열의 눈물을 흘렸다.


지금도 근 십칠 년이 지났지만, 그때의 장면이 뇌리에 또렷이 각인되어 있다. 나는 큰아이를 가슴에 안고 가면서 “아! 세상이란 이런 곳이구나!” 하는 삶의 참된 의미와 아이를 위해서라도 인생을 함부로 살지 말자는 생의 의지를 굳게 다졌다.


그때가 내 삶에서도 시련과 좌절을 벗어나 새롭게 출발하던 시기였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이 자라면서 학교에 들어갈 때부터 생일날에 종종 편지를 받아 왔다.


<아빠에게>


아빠! 생신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벌써 48번째 생신이네요? 우와 세월 가는 게 정말 빠르네요? 전 항상 아빠가 42살인 것 같아요? 히히‥^^ 이제 지천명을 바라보실 나이인데 하늘의 뜻은 잘 아셨나요?


17년 동안 잘난 것도 없는 저를 보살펴주시고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당! 맨날 말도 안 듣고 서희랑 싸우기만 하구TT 이제 저도 고 2니까 철 좀 들고 아빠 말도 잘 듣고 제가 해야 할 일을 알아서 잘할게요!


아빠의 흰머리가 더는 생기지 않도록 노력할게요? 아빠랑 저랑은 성격이 참 비슷한 거 같아요?ㅋㅋ 가끔 그런 점을 보면서 유전의 오묘함을 느낀답니다.ㅋㅋ


아 맞다. 넥타이랑 Y셔츠를 엄마한테 요즘 젊은이들이 잘 입는 짙은 색 셔츠에 밝은 색 넥타이를 사라 그랬는데 엄마가 이상하다고 다른 거 사 왔어요.


엄마가 사 온 것도 보니깐 되게 이쁘지만, 아빠도 젊게 살고 싶지 않으세요? 아니에요? 아니면 말고요 히히‥ 아빠! 엄마랑 사이좋게 지내시고 오래오래 사세요. 그래야 저희가 효도를 하죠.


엄마하고 아빠의 노후는 저희가 책임질게요! 저희에게 그렇게 많은 정성과 사랑을 주셨는데 당연한 거죠. 잘 생기고 노래도 잘하시는 우리 자랑스러운 아빠 사랑하고 생신 축하드려요.(From 큰딸 올림)


<나의 아버님께>


안녕하세요^^ 저 서희입니다.

꽤나 쌀쌀해진 날씨에 추우시죠? 봄이 완연해지기 전에 겪는 잠시의 불행 또는 고난이라 여기고 전 잘 버텨나가고 있어요.


어느 새에 나이가 차츰 들어가는 나이인데도 제가 아버지를 위해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어서 참 죄송해요. 항상 술 드시고 집에 들어오실 때면 왠지 모르게 죄송스러워지고 제 탓인 것 같아 자책도 해요.(그러니까 끊으셔야죠?)


자꾸만 어긋나는 제 마음 때문에 엄마랑 언성만 높아지게 되고, 안 그러겠다는 약속에 자신이 없네요. 너무 늦은 것은 아닌지 생각도 들어요. 하지만! 항상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 때니까 노력해 볼게요. 부모님 기대에 어긋나지 않은 사람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항상 믿어주시고 어떤 나쁜 짓을 해도 너그럽게 봐주시고 때론 인격적 문제로서는 다정한 꾸중을 해주신 아버님께 감사하고요. 훌륭한 직장과 집에 사는 어른이 되지 못하더라도 바른길에서 당당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이렇게 다정하신 아버님이 태어날 수 있게 해 주신 하느님과 할머니와 할아버지께 감사드리고 생신 축하드립니다. (막내 올림)


내 생일날에 고사리손에 편지를 들고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아빠! 생일 축하해요!”라면서 편지를 건네준다. 아이들의 그런 모습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행복한 아빠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젖어든다.


물론 나도 가끔 딸들 생일에 편지를 써서 축하해 준다. 지천명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 아이들이 건네준 편지를 읽어보면 두 아이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다.


두 아이는 편지에 꽤 많은 것을 적었다. 큰아이는 배우는 수준에 맞게 지천명이란 단어를 언급하면서 자신과 아빠의 성격이 비슷하다는 점과 아빠를 세상에 젊게 드러내려는 청춘의 세심함이 담겨 있다.


그리고 자기가 커서 엄마와 아빠에게 효도하고 부양하겠다는 마음의 부담도 서슴없이 표현해 놓았다. 큰아이가 나중에 얼마나 실천할지 편지를 두고두고 간직했다가 증거로 삼아도 될 만한 것을 써놓았다.


이에 비해 작은 아이는 자신이 겪는 정신적 심리적 마음의 갈등과 엄마와 사사건건 부딪치는 마음의 미묘한 갈등과 삶을 당당하게 살아가겠다는 당찬 마음을 표현해 놓았다. 그리고 사춘기를 겪고 있는 풋풋한 성장의 냄새가 작은 아이의 편지에 고스란히 배어있다.


내가 생일날에 아이들의 편지를 받을 만큼 행복한 사람인가 물음표가 앞선다. 내가 두 아이를 위해서 해준 것은 별로 없다. 편지라는 도구는 참 좋은 것 같다. 나는 아이들의 편지를 사무실 서랍에 넣어두고 한가할 때마다 수시로 꺼내어 읽는다.


두 아이의 편지를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아이들이 아빠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에 그나마 위안으로 삼는다. 아빠에게 미안하다는 것은 아빠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것과 그동안 귀동냥으로 전해받은 것들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들어있어서다.


나는 아이들에게 커서 어떤 사람이 되라거나 무엇을 해야 한다는 의무를 부여한 적은 없다. 하지만 두 아이는 아빠라는 커다란 벽 앞에 서면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겸손한 마음이 참으로 가상하다.


아이들이 자라서 무엇을 하게 될지는 아직 모른다. 아빠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에는 인생을 열정적으로 살아가려는 희망과 꿈이 담겨 있다.


내 생일에 받은 편지를 벌써 몇 번째 읽었다. 편지는 읽으면 읽을수록 편지 행간에 실린 사람의 감정에 다다르게 하는 오묘한 힘이 실려 있다.


우리가 대화를 나누면 대화가 끝나자마자 말들이 허공으로 사라진다. 그런데 편지는 두고두고 꺼내어 읽을 수 있는 추억이 생겨서 좋다. 내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미세한 것을 전할 수 있는 도구도 편지다.


나는 아내에게 편지를 잘 쓰지 않는 편이다. 편지를 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쓰지 못한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아이들에게 편지를 쓰면 종일토록 써도 힘이 난다.


그러나 아내에게 무언가를 써보려고 하면 몇 자 적기도 전에 막다른 길에 도달한 듯이 말이 뚝 끊어져 버린다. 아이들에게 대하는 마음과 아내를 대하는 마음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내 생일날에 받은 아이들의 정성이 가득한 편지. 아이들의 고마운 마음을 무엇으로 전할까 참으로 고민이다.


아이들이 아빠에게 미안한 감정을 갖고 있듯이 나 또한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살아간다. 친구들과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차이가 있음에도 내색 한번 하지 않는 딸들이 그저 고마워서다.


이런 것이 삶인가 보다. 서로 미안한 감정을 갖고 서로를 배려하며 가족이란 울타리에서 함께 울고 웃는 것이 삶이란 등불일까.


지천명을 바라보는 나이에 새삼 둥지의 따스함과 가족이란 명사를 다시 한번 생각나게 하는 참된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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