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절 목이 터지도록 ‘소양강 처녀’를 부르던 때가 생각난다. 소고삐를 부여잡고 들녘에 나가 소와 함께 호흡을 맞춰가며 즐겨 부르던 노래가 '소양강 처녀'다.
그때 노래를 부르면 소양강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고, 저 멀리서 소양강 처녀가 치맛자락을 나풀나풀 휘날리며 달려오는 것을 상상하곤 했다.
‘해 저문 소양강에 슬피 우는 두견새야 열여덟 딸기 같은 어린애 순정 너마저 몰라주면 나는 나는 어쩌나 아∼ 그리워서 애만 태우는 소양강 처녀’. 이 노래는 부르기만 해도 마음이 저절로 짠해진다.
소양강은 유년 시절 고기를 잡던 전설의 강은 아니다. 하지만 귓전으로 수없이 듣던 소양강 처녀라는 명사 때문에 선머슴에게 그리움과 설렘을 품게 했다.
그 시절엔 소양강이 어디에 있고 소양강 처녀가 실제로 소양강에서 피어난 전설의 처녀인지도 모르고 노래만 불렀다. ‘소양강 처녀’란 노래는 부르면 부를수록 애틋한 정서와 가슴에 한이 느껴지면서 특별한 사연이 담겨 있는 듯하다.
가족과 우연한 기회에 소양강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런데 소양강에서 만난 처녀는 사람이 아닌 소양강 준공 기념탑에서 양손을 높이 치켜들고 만세를 외치는 석녀였다.
전설과 노래로만 듣던 소양강 처녀를 소양강 댐에서 만났지만 반갑게 인사를 나눌 수도 없었다. 소양강에서 소양강 처녀를 만나자 반가움보다는 허망함이 그리움보다는 차라리 아니 만남만 못한 아쉬운 마음이 앞섰다.
피천득의 ‘인연’처럼 그토록 보고 싶고 그리워하던 ‘아사코’를 아니 만남만 못하다는 말이 또렷이 떠올랐다. 사람은 그리워하는 것은 그리워하는 마음만으로 족하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아무리 보고 싶고 그리운 것도 막상 현실에서 만나면 그리움은 사그라든다. 전설은 전설일 뿐 그 전설 속으로 들어가지 말아야 하는 것이 삶의 이치다. 삶에서 감내해야 할 환상이자 현실이다.
소양강 댐 밑에서 버스를 타고 제방에 올라가서 내리면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이 준공 기념탑이다. 우뚝 솟은 기념탑 앞면에는 댐을 건설한 근육질의 남자가 반기고, 뒷면에는 소양강 처녀가 손을 번쩍 들어 올리고 오고 가는 사람을 반겨준다.
소양강 댐을 찾아오는 누구나 반겨주는 이가 이들이다. 소양강 댐은 밑에서 바라볼 때는 그리 크게 보이 지 않는다. 하지만 댐 둑에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산하가 웅장하게 펼쳐진다.
마치 백만 대군을 거느린 장군의 위엄처럼 댐 밑으로 펼쳐지는 자연의 풍광은 바라볼수록 장엄함에 매료된다.
소양강 댐에 올라가 주변을 바라보면 청산이고 머리 위는 창공이다. 푸른 청산과 창공을 바라보면 말없이 티 없이 살고 싶은 청빈한 마음이 생겨난다.
사랑도 미움도 탐욕도 성냄도 벗어놓고 바람이 부는 대로 구름이 흘러가는 대로 살고 싶다. 머릿속에 든 번잡한 생각을 내려놓고 청빈한 마음으로 산천이나 배회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이 솟아난다.
소양강 수면 위를 유유자적하는 조각배와 먹을 것을 찾아 날아다니는 새들의 춤사위. 댐 주변에서 고단한 생을 이어가며 한잔하고 가라며 불러대는 아주머니의 낭랑한 목소리.
트럭에 짐을 가득 싣고 부지런히 댐을 오르내리는 운전기사의 바쁜 손놀림. 몇십 분 간격으로 사람을 실어 나르는 버스 기사의 바지런한 모습. 소양강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니 마음이 저절로 숙연해진다.
그동안 전설과 노래로만 그리워했던 소양강 처녀. 이제는 기념탑에서 내려와 소양강에 오고 가는 사람을 반갑게 맞이하라고 전해주고 싶다.
비록 소양강에서 그토록 보고 싶고 그리워하던 소양강 처녀를 만나지 못했지만, 가슴속의 전설과 노래로만 남겨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상상으로나 그리워하며 노래나 부르면서 마음을 달래야겠다.
소양강 저편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어디서 불어오는 바람인지 모르지만, 소양강의 전설을 우르르 몰고 오는 듯하다. 그 바람에 가슴에 품었던 그리움과 전설의 이야기를 바람결에 멀리 날려 보냈다.
먼 훗날 언젠가 소양강 처녀가 그 바람을 타고 돌아와 생글생글 웃으며 흘러간 옛 소식이나 전해주기를 간곡하게 부탁했다.
소양강 유람선, 소양강 막국수, 소양강댐 산채식당, 소양강댐 닭갈비집. 이들은 소양강에 기대어 생을 이어가는 현생들이다. 푸르른 청산과 창공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그들이 부럽기만 하다.
그들은 탐욕도 성냄도 버리고 바람 따라 구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닐까. 사랑도 미움도 훨훨 털어버리고 소양강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들.
나는 소양강에서 또 다른 소양강 처녀를 만났다. 소양강에서 만난 소양강 처녀는 이생에서 만난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들과 헤어지는 아쉬움과 그리움을 달래며 석별을 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