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유년의 뜰에는 하늘을 향해 기지개를 켠 시냇가의 느티나무와 산자락에 비스듬하게 선 소나무가 자리한다. 그들은 동심의 꿈이 펼쳐지는 유한의 세계였고, 낯선 세상을 동경하는 시원을 품게 해 주었다.
그러다 동심의 언덕 너머 낯선 세상으로 나오자 동구 안과 밖에서 일어나는 바람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고향을 등지고 나자 동심의 언덕은 나도 모르게 마을과 고장과 지역을 가르는 잣대로 변했다.
누가 무엇을 위해 세운 기준인지는 모른다. 내가 동심의 언덕과 인연을 맺은 것은 어머니가 낳아준 죄밖에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를 동심의 언덕 안으로 몰아넣는 잣대로 이용한다.
그리고는 자기들 멋대로 지역을 가르고 누가 잘나고 못났다 하면서 떠들어댄다. 동구 밖을 나와 이런저런 편견에 휩싸이고 바람에 떠밀려 떠돌이 생활을 하다 보니 동심의 언덕은 차츰차츰 가슴에서 멀어져 갔다.
유년 시절 그 언덕에서 무언가를 기다리는 기다림의 미학을 배웠다. 언덕 위로 바람이 불어오면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바라보고, 붉은 해가 솟아오르면 고개를 들어 끝없이 펼쳐진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다.
유년 시절 그 언덕은 세상을 가늠하는 커다란 울타리였다. 그 울타리를 벗어나면 무슨 큰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 그러다 바람에 떠밀려 울타리를 벗어나자 아버지의 말씀처럼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를 기다린 것은 삶의 거친 물살뿐이었고 무엇 하나라도 얻으려면 수많은 고통과 상처라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렇게 만난 세상의 거친 바람은 나를 동심의 언덕에서 자꾸만 멀어지게 했다.
삶이란 바람은 고향의 흙냄새와 근원의 그리움을 서서히 잊게 하는 망각의 바람으로 다가오고 불어왔다. 지금도 시절 따라 계절 따라 고향을 들고 날 때마다 그 언덕을 지나간다.
그 언덕 주변의 풍경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풀 숲은 무성해졌고 길은 황토색에서 검은색으로 변했다. 나선형의 곡선이던 옛 오솔길은 넓어졌고, 길 가락도 곡선에서 직선으로 누운 채 오고 가는 나를 반겨준다.
고향을 굳건하게 지키는 시냇가의 느티나무도 어머니의 머리카락처럼 세월의 나이를 먹어 우듬지가 듬성듬성 빠졌다. 그리고 비탈진 산자락에 비스듬히 선 소나무는 장년으로 변해 나보다 많은 나이테와 자식을 거느린 채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동심의 언덕은 내게 세월의 풍화작용을 가르쳐 준다. 고향에 들어갈 때는 지금의 나이에서 유년의 나이로 되돌아가게 하고, 고향에서 볼 일을 보고 언덕을 내려올 때면 현재의 나이로 돌아온다.
고향을 오고 가는 횟수의 누적이 육신의 나이테를 늘려간다. 언제까지 이런 되풀이를 할 수 있을지는 나도 모른다. 그저 육신이 움직이기를 거부하는 날까지 부지런히 오고 갈 뿐이다.
동심의 언덕은 내게 꿈과 희망을 품게 하는 소망의 언덕이다. 내 삶이 다하든 다하지 않던 부모님은 그 언덕에서 영원히 나를 기다릴 것이다.
내가 육신에 의지해 힘겹게 언덕으로 향해 저어 가면 가슴에 생명의 샘물이 솟아난다. 그러다가 언덕을 미끄러지듯 내려오면 허전해지면서 부풀었던 가슴이 가라앉는다. 동심의 언덕에서 동무들과 뛰어놀던 시절이 엊그제 같다.
며칠 있으면 명절이다. 명절 때 나는 다시 힘든 육신을 이끌고 그 언덕을 올라가야 한다. 이번 명절에는 아이들과 함께 수줍고 발그레한 모습으로 떠오르는 보름달을 보고 싶다.
유년 시절 명절이 다가오면 그곳에서 어머니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밝음이 물러나고 어둠이 내리는 저녁이면 어머니가 머리에 이고 오는 사랑의 보따리가 멀리서 가뭇가뭇 다가왔다. 그 보따리 위로는 붉은 기운을 띈 보름달이 떠올랐다.
그 언덕에서 마주한 보름달은 크고 둥글고 아주 밝았다. 그런데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바라보는 보름달은 세월에 찌든 탓인지 바라볼 수도 만나기도 어려워졌다.
어쩌다 길을 걷다 만나는 보름달은 삶의 허망함이 가득한 달로 바라보였다. 세월의 거친 바람이 마음을 변화시키고 타락시킨 것 같다.
그리고 언덕에서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을 잊은 지도 오래다. 동심의 언덕에서 진득하게 눌러앉아 어머니와 붉게 떠오르는 보름달을 기다리는 것도 전설이 되고 말았다.
세월의 시간이 깊어갈수록 그 언덕은 점점 마음에서 멀어지고 작아져만 간다. 그 언덕은 내게 낯선 세상과 연결해 준 소중한 징검다리이고 지치고 힘든 삶의 원기를 회복시켜 준 소망의 언덕이다.
나를 성장시켜 어른이 되게 만들어 준 시냇가의 느티나무와 산자락에 소나무가 자라는 곳. 오늘도 나는 잃어버린 동심의 꿈을 찾기 위해 그 언덕을 바라보며 집시처럼 삶의 발걸음을 재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