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로연수 기간에 집안일도 하면서 종종 밖에 나가 친구도 만난다. 아침에 산책을 마치고 와서 책상에 가만히 앉아 내 삶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에 대하여 생각해 보는 중이다.
기차가 정거장을 출발해서 목적지에 도착하면 다시 새로운 목적지를 설정해야 한다. 기차의 목적지가 종착역이 아니듯이 직장인에게 퇴직은 인생의 종착역이 아니고 새로운 출발점이다.
기차가 목적지에 도착하면 새로운 목적지를 설정해야 하듯이 직장인도 직장을 퇴직하면 새로운 인생 항로의 이정표를 설정해야 한다.
공로연수 기간에 무엇을 하면서 시간을 보낸 것일까. 삶을 정산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반성할 것은 반성하고 정리할 것은 깨끗하게 정리하고 가는 것이 삶의 이치이자 도리다.
나는 회사를 책임지고 운영하던 사람도 아니고, 공직에서 높은 자리에 앉아 있다 물러난 사람도 아니다. 따라서 내가 비워야 할 자리에 누군가에게 인수인계를 하거나 주의하라고 남겨 줄 것도 없다. 그냥 빈자리로 물려주면 그만이다.
공로연수로 보낸 기간도 그럭저럭 육 개월이 되어간다. 그동안 무엇을 했나 하며 시간을 톺아보니 뚜렷하게 내세울 것도 의미 있거나 추억이 될만한 것도 별로 없다.
처음에는 공로연수 일 년을 어떻게 유의미하게 보낼까 하는 것을 걱정했다. 그러다 육 개월이란 시간이 흘러가자 남은 시간도 지금처럼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올해는 시간이 나는 대로 친척을 찾아가 인사도 드리고 이곳저곳 구경하며 보내려고 했다. 하지만 집에서 체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무언가를 해보고 싶은 욕구만 분출했다.
처음 한 달은 직장에 출근하지 않고 집에 있으니 몸과 마음이 편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직장에 다니며 행동했던 습관이 하나둘 떠오르면서 집에서 쉬는 것이 점점 어려워졌다.
사람은 습관의 동물이란 말처럼 그동안 직장에 다니면서 했던 행동과 생각이 몸에 남아 있어 마음은 늘 어딘가를 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강하게 작용하는 것 같다.
따라서 집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편한 것이 아니라 불안한 감정이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면서 마음을 이리저리 흔들어 댄다. 그렇다고 딱히 어딘가를 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다닐 수도 없는 상태다.
공로연수 기간은 공무원 신분으로 국가에서 급여를 받는 몸이라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지금에 와서 공로연수를 왜 신청했을까 하는 것을 돌아보는 것도 의미 없고, 앞으로 무엇을 하면서 보낼까 하는 것이 먼저다.
집에 머물며 세상을 바라보니 주변의 누군가를 도와주거나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거나 할 사람이 없다. 그저 막막한 생각만 들뿐 누군가에게 신세를 지는 것도, 누군가에 무엇을 부탁하기도 어렵다.
그리고 앞으로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하는 것도, 무언가를 배워보겠다는 의욕도 일지를 않는다. 지난해 세운 계획대로 해보려 했지만, 사회적으로 개인적으로 다양한 일들이 벌어지면서 많은 것이 틀어졌다.
그런 일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없을 뿐만 아니라 통제할 수 있는 것도 없다. 사람이 살다 보면 이런저런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고 우연과 필연은 반드시 작용한다.
내 앞에서 일이 발생하면 그 일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생각하는 것이 먼저다. 그 과정에서 어떤 선택을 하든 하지 않든 사는 것이 삶이다.
이제와 지난 시간을 돌아보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 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사람인지라 무의미 속에서 유의미를 찾기 위해 시간을 돌아보는 것이다.
오늘은 종일 가랑비가 소리 없이 내린다. 어젯밤에 소나기가 무섭게 쏟아졌다. 가랑비에는 어젯밤의 소란과 눈물을 머금고 내린다는 생각이 든다.
비가 내리는 지도 모르는 날에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집 앞에 나가 점심을 먹고 들어왔다. 지금은 베란다에 나가 창밖을 내다보며 하늘하늘 떨어지는 가랑비를 멍하니 바라보는 중이다.
어제만 해도 아파트 단지 사잇길 횡단보도 공사로 날카로운 쇳소리가 들려와 마음이 불편했다. 오늘은 공사하는 소음이 사라지고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노는 소리와 아파트 단지 공원에서 들려오는 새소리뿐이다.
공로연수 남은 기간에는 무엇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게 될까. 내년에는 사회인으로 정착해서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앞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계획을 세워보지만, 과연 지켜낼 수는 있을까.
지금 무엇을 해보겠다고 마음을 굳게 다져 잡아도 그 시간을 충실하게 보낼 수는 없다. 앞으로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거나 만나면서 방해를 받을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에 직면하면 새로운 선택과 유의미한 시선을 통해 돌파구를 하나하나 찾아가야 한다. 계획은 세우되 그것에 대한 실천은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유연하게 대처하면 그만이다.
직장을 퇴직하고 새로운 직장을 얻는다면 아마도 가장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도록 노력도 하고 이리저리 뛰어보겠지만 되면 다행이고 안 돼도 어쩔 수 없다.
새로운 직장을 얻는 것보다 인생을 길게 내다보고 천천히 여유롭게 즐기면서 살아가고 싶다. 새로운 직장을 얻는다 해도 나이 제한 때문에 몇 년밖에 근무할 수 없을 것이다.
직장이란 언젠가 반드시 나와야만 하는 곳이다. 따라서 직장보다는 생활의 안정이 중요하고 건강을 우선하는 시기가 퇴직 후의 생활이다.
세상에 태어나 한 직장에서 정년퇴직 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지 욕심을 낸다면 결과적으로 손해가 될 것이다.
새로운 직장을 구하는 욕심은 일찌감치 접었다. 어차피 퇴직 후 직장에 들어간다 해도 조건부일 수밖에 없다.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니 기억에 남을 일도 그렇다고 자랑할 것도 없다.
남에게 내세울 것이 많다면 지난 시간을 돌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텐데. 그나마 이렇게 홀가분하게 빈손으로 다가오지 않은 내일을 설계하고 생각하는 순간이 더 즐겁다.
삶은 물처럼 흘러가게 두고 순간순간 맞이하는 시간에 충실하게 보내는 것도 유의미한 삶이자 여유로움이다. 그 과정에서 참된 시간을 돌아보고 내일을 맞이하며 살아가는 것이 삶을 아름답게 빚어내는 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