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임 준비

by 이상역

공직에 근무하는 것도 이번 주면 끝이다. 마침내 내게 다가올 것 같지 않던 시간이 가까이 다가왔다. 직장에 근무하던 시절만 해도 퇴직 인사를 오던 사람과 악수를 나눌 때마다 그들을 부러워했다.


그러다 내가 당사자가 되자 모든 것에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고맙기만 하다. 국가에서 주는 마지막 월급이 새벽녘에 은행 계좌로 입금되었다.


앞으로 국가에서 월급을 받고 싶어도 받을 수 없고, 자리가 없어져 앉아야 자리도 없다. 저무는 해처럼 공직도 떠나야 하고, 이제는 사회인으로 생활해야 한다.


지금까지 공직에서 보낸 날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직장에서 주는 마지막 월급을 받고 보니 공직에 처음 들어와서 받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십 대가 되던 해 고향의 읍사무소에 발령을 받고 첫 월급이라며 봉투를 건네주던 담당자의 말이 생각난다. 첫 월급을 타면 부모님께 빨간 내복을 사드려야 한다고 해서 퇴근길에 빨간 내복을 사다 부모님께 드렸다.


그로부터 꼬박 40년의 세월이 흘렀고 이제는 직장에서 물러나야 한다. 그간 한 푼 두 푼 모아 집도 장만하고 아이들 교육에 결혼까지 시켰다.


매달 받는 월급으로 다음 월급날까지 버티며 살아왔다. 그나마 지금까지 남에게 빚을 지지 않고 살아온 것은 아내의 근검절약과 검소한 생활 덕분이다.


그 덕분에 나는 집안 살림과 아이들 걱정하지 않고 무탈하게 직장에 다녔고 무사히 퇴직까지 하게 되었다. 국가에서 마지막으로 받은 월급은 앞으로 가족과 잘 지내라고 격려하는 의미로 준 것 같다.


코로나로 세상은 어수선하지만, 가족에게 성탄 선물을 준 것처럼 마음은 기쁘다. 직장에서 조촐한 퇴임식을 해준다고 한다. 퇴임식을 어떻게 할지 몰라 혹시나 하는 생각에 퇴임 인사를 준비해 두었다.

안녕하십니까? 세상은 코로나로 어려운 상황임에도 오늘 이렇게 퇴임식 자리를 마련해 주신 원장님 이하 직원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 앞에 서니 그동안 공직 생활하며 겪은 희로애락이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떠오릅니다.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지 그저 막막하기만 합니다.


참으로 많은 곡절과 사연이 생각나고, 오롯이 몸으로 부딪치며 그간 세월을 버티고 보낸 것 같습니다. 특히 저는 다른 사람보다 부처를 옮겨 다니는 바람에 인생의 곡절이 더 많아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제가 근무하면서 혹시라도 여러분에게 섭섭하게 하거나 서운하게 한 것이 있다면 너그러운 이해와 용서를 바랍니다. 사람은 떠난 자리에 아무것도 남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오늘 이렇게 여러분에게 축복의 환송을 받으며 떠날 수 있게 된 것은, 여러분의 따듯한 배려와 도움 때문입니다. 지난 일 년간 공로연수를 보내며 그간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았습니다.


다른 무엇보다 첫 수필집인『세종청사에서 맞이한 이순의 봄』을 출간하여 여러분에게 남길 수 있어 아주 뜻깊은 한 해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공직에서 물러나지만, 마음은 늘 여러분 곁에서 함께 하겠습니다. 앞으로 여러분의 가정에 슬픈 일이나 기쁜 일이 생기면 함께 슬픔과 기쁨을 나눌 수 있도록 연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공로연수를 보내며 깨달은 것은 직장생활도 중요하지만, 직장에 다니면서 취미생활을 기르지 않고 사회에 나가면 누군가를 만나거나 이야기 나누는 것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사회로 나갈 때 연착륙시켜 주는 것은 취미생활입니다. 퇴직 후에 취미를 찾는 것은 너무 늦고 몸과 마음이 따라 주지 않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현직에 계실 때 취미를 살려서 퇴직 후를 대비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자리든 물러날 때 사연이 길어지면 그 자리에 핑계만 남는다고 합니다. 여러분에게 이 자리를 빌어 제 마음을 전할 수 있어 기쁩니다. 아무쪼록 여러분의 가정에 축복과 행운이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연말에 퇴임식도 해야 하고 마지막 급여까지 받고 보니 직장을 떠나야 하는 것은 확실해졌다. 금년도 연말은 나와 우리 가족에게 축복의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공직의 퇴임을 요란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고 말았다. 나이 든 사람은 물러나고 젊은 사람이 그 자리에 들어서는 것은 자연의 순리이자 이치다.


사람은 나이가 들어 때가 되면 자리를 물러날 줄 아는 것도 삶의 지혜다. 어느덧 나도 노을이 지는 장년의 언덕길에 들어서고 있다.


내가 아무리 가기 싫다고 거부해도 갈 수밖에 없다. 앞으로는 사회인이 되어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야 한다. 지금까지는 국가의 보호 아래 투정도 부리고 되지 않는 호기도 부리며 살아왔다.


이제는 그런 갓끈과 보호막이 모두 사라졌다. 국가의 보호막도 관직의 직위도 나를 대표하던 명함도 없다. 그동안 나를 보호하던 벽을 모두 허물어 버리고 허허벌판에서 홀로 살아남아야 한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고 적응해야 한다. 나를 앞서간 선배들도 똑같은 과정을 겪으며 사회인이 되었다. 그리고 말없이 조용하게 인생의 노후를 보내고 있다.


직장을 물러나면 나를 지배하던 직장의 규율과 규칙은 사라지고 사회를 규율하는 전통과 질서가 들어설 것이다. 전통과 질서는 그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직장의 규율과 규칙은 선배나 동료들이 가르쳐주는데 사회에서는 그 누구도 전통과 질서를 가르쳐주거나 말하지 않는다. 공직을 마치고 사회에 나가려니 두려움이 앞선다.


공직이 끝나서 좋은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에 나가 적응하려니 두렵게만 다가온다. 공직에서 호기를 부리며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것을 받아주지 않는 곳이 사회다.


사회는 냉정하고 생존경쟁의 법칙이 철저하게 작용하는 무대다. 어찌 되었든 그간 공직을 대과 없이 마무리할 수 있게 되어 기쁘기만 하다.


이런 영광의 무대를 누릴 수 있도록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과 부족한 사람과 결혼해서 무탈하게 가정을 이끌어 온 아내와 잘 자라준 딸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오늘의 축복이 있기까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도와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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