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구를 넘다

by 이상역

1996년도쯤에 국민학교 명칭이 일제의 잔재라고 하여 설왕설래 끝에 초등학교로 명칭을 변경했다. 나는 초등학교가 아닌 국민학교를 고향의 음달마을과 양달 마을에서 다녔다.


유년 시절 동구를 넘지 못하던 개구쟁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로 자랐다. 초등학교 입학식 때 아버지 손을 잡고 황톳길을 따라 십여 리 떨어진 사석의 성암초등학교까지 걸어갔다.


왼쪽 가슴에 커다란 손수건을 매달고 아버지 손을 잡고 걸어갔던 기억이 아직도 또렷이 떠오른다. 고향의 동구 안에서 뛰어놀던 개구쟁이가 학교에 입학하게 되자 주변 환경이 달라졌다.


초등학교 일 학년 담임은 권오남 선생님이다. 학교에 가서 선생님을 만나는 것이 마냥 좋았다. 교실은 학교 운동장 뒤 개울가 옆에 자리한 작고 아담한 건물이었다.


교실에서 한글을 배우기 위해 선생님을 따라 ‘아버지, 어머니’를 복창하고 어미 닭을 쫓아다니는 병아리처럼 선생님의 구령에 맞추어 운동장에서 양손을 들고 줄 맞추는 연습을 하고, 교실에서 선생님의 풍금 소리에 맞추어 ‘학교 종이 땡 땡 땡’이란 노래도 배웠다.


사석의 초등학교에 들어가자 교실과 운동장과 신발장 그리고 황톳길과 미루나무로 변한 주변 환경은 마을 동구에서 불어오던 바람의 냄새와 향기가 서로 달랐다.


학교에 가면 친구들과 운동장에 놀이기구가 많아서 좋았다. 초등학교 일 학년 담임 선생님의 얼굴은 지금도 머릿속에 희미하게 남아 있다.


친구들과 함께 공부하던 교실과 운동회 때마다 어머니가 보따리에 싸 온 고구마와 옥수수 등을 운동장에서 먹고 청소 시간이면 교실과 마루에 초를 칠해 가며 걸레로 박박 문지르고 닦던 기억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초등학교 저학년 때로 기억되는데 학교 운동장에서 뛰어놀고 있는데 보건소 차가 학교에 와서 소아마비 예방주사를 놓고 있었다. 예방주사를 맞은 친구들이 엉엉 울면서 교실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는 주사 맞기가 겁이 나서 주사를 맞지 않고 집으로 도망을 갔다.


그날 학교에서 주사를 맞지 않고 도망을 오는데 어머니가 마을회관 옆 텃밭에 앉아 마늘밭을 매시다가 오늘은 학교에서 일찍 온다며 웃으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어머니에게 학교에서 주사를 맞지 않고 도망 온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이튿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학교에 갔다.


그 시절 주사를 맞으면 꽤 아팠다. 주사기도 크고 바늘도 굵어 소아마비나 콜레라와 같은 예방주사를 맞으면 우리 또래들은 어깨에 훈장처럼 상처로 아문 흔적이 또렷이 남아 있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때만 해도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이다. 학교 정문 앞에는 가계가 두 곳이 있었다. 하굣길에 구멍가게에 들러 탐스럽고 신비하게 생긴 과자나 장난감 구경을 하고 나서 집에 가는 것이 일과였다.


그 시절 언젠가 어머니가 용돈 하라며 거금 오 원을 주신 적이 있다. 당시 오 원이면 꽤 큰돈이다. 이튿날 용돈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손에 꼭 움켜쥐고 학교에 가다 연평 논 밑에 물이 고인 웅덩이를 건너뛰다 용돈을 그만 놓치고 말았다.


흙탕물 웅덩이에 돈을 떨어트리는 바람에 돈은 찾을 수가 없었다. 나는 용돈을 잃어버린 서글픔에 화가 나서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떼를 썼다. 그러자 누님이 나를 달래려고 등에 업고 학교에 갔던 기억이 난다.


그날 누님 등에 업혀 본 것은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다. 그 이후 누님의 등에 업혀 본 적은 없다. 돈을 잃은 분함보다 그 돈이면 과자나 사탕을 사서 먹을 수 있는 돈이 없어진 것이 서글펐다. 일원이면 번데기가 열 개 알사탕이 두 개였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제일 먼저 교문 앞 가게로 달려갔다. 친구가 번데기 과자나 사탕을 사서 먹으면 그 친구에게 얻어먹려고 갖은 궁리를 썼다. 친구의 가방을 들어주거나 구슬이나 딱지와 맞바꾸어 먹곤 했다.


수중에 돈이 없는 것보다 어떻게 하면 과자를 친구에게 얻어먹을 수 있을까 하는 것에 대한 궁리로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학교 앞 가계는 새로운 장난감이나 신기한 먹을거리가 나올 때마다 아이들의 호기심과 배고픈 갈증을 불러일으키는 화수분이었다.


그곳에서 새로운 물건이나 과자에 대한 호기심을 채우고 나면 미루나무 이파리가 펄럭이는 황톳길을 따라 친구들과 장난치면서 어슬렁어슬렁 집을 향해 걸어갔다.


그렇게 집으로 가다 종종 흙먼지를 폴폴 날리는 십 발이 트럭(물을 넣어 트럭 앞에서 회전을 시켜 시동을 거는 트럭)을 만나는 날은 집에 가는 것이 수월했다. 털털거리며 느리게 달리는 트럭 뒤에 올라타서 지암삼거리에서 뛰어내려 시골집까지 터벅터벅 걸어갔다.


지암삼거리는 학교에서 집까지 절반쯤 되는 곳이다. 트럭을 타고 지암삼거리에서 뛰어내리면 걷는 거리가 절반으로 줄어든다. 황톳길이라 트럭이 느리게 가서 키는 작았지만, 트럭을 타고 내리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고향의 양달 마을에서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여름이면 종종 마당에 멍석을 깔고 가족들이 저녁을 먹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당에서 저녁을 먹고 있는데 마른하늘에서 날벼락 치는 소리가 들려 가족 모두가 놀랐다.


아버지가 일어나 집을 한 바퀴 돌고 오시더니 사랑방 지붕이 반쯤 내려앉았단다. 그 재해로 문안산에 주둔하던 미군 부대에서 구호품까지 나왔다. 그 덕분에 미군부대 건빵도 먹어보고 닭털이 들어간 야전 침낭에 들어가 잠도 잤다.


양달 마을의 초가집 지붕이 무너지는 바람에 음달마을에 집을 사서 이사를 내려와 초등학교는 저학년은 양달 마을에서 다니고 고학년은 음달마을에서 다녔다.


초등시절은 배움에 대한 추억보다 학교를 오고 가는 황톳길에 남긴 추억이 더 많다. 마을의 동구를 넘어 낯선 세계를 향해 떠났던 설렘의 기억은 지금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 또 다른 설렘의 동구를 치근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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