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에 다니면서 가장 즐거웠던 시간은 점심에 빵을 먹는 것이다. 선생님은 도시락을 싸 오지 않거나 형편이 어려운 학생에게 점심시간에 빵을 네 조각으로 잘라 나누어 주셨다.
당시 빵의 맛은 내게 특별했다. 지금도 빵집 옆을 지나가다 구수한 냄새를 맡으면 옛 시절을 생각하며 빵을 사서 먹곤 한다. 그 시절엔 어머니가 만든 술빵 외에 공장에서 만든 빵을 구경도 할 수 없었다.
점심시간에 선생님이 지급한 빵으로는 양이 차지 않아 학교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과 이튿날 학생들이 먹을 빵을 싣고 오는 트럭을 기다렸다. 능수버들이 휘휘 늘어진 계단의 그늘에 앉아 빵 차가 오기를 기다렸다.
플라타너스가 우거진 교문을 바라보면서 머릿속에는 빵을 먹는 생각과 그 빵을 남겨 집에 가져가 동생과 나누어 먹는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 생각에 젖어 교문을 바라보고 있으면 흙먼지를 폴폴 날리며 교문으로 빵 차가 들어왔다.
빵 차가 계단 밑에 도착하면 기사 아저씨가 운전석에서 내려 차의 뒷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트럭 뒤에서 구수한 빵 냄새가 흘러나오면 잽싸게 달려들어 빵이 담긴 바구니를 기사 아저씨에게 넘겨받았다.
친구들과 바구니에 담긴 빵을 교무실까지 나르고 나면 기사 아저씨는 고생한 우리에게 빵을 하나씩 나누어 주셨다. 그때는 빵을 먹는 것에 만족한 것이 아니라 그 빵을 집에 가져가서 동생들과 나누어 먹을 생각에 기분이 으쓱해졌다.
그리고 아랫마을에는 나보다 나이는 한두 살 적었지만 덩치가 큰 아이들에게 빵을 빼앗기는 괴롭힘을 당했다. 그 아이들은 마을의 골목을 지키고 있다 홀로 마을을 지나가는 초등학교 친구를 붙잡아 가방을 뒤져 빵을 빼앗곤 했다.
그 아이들과 골목길에서 숨바꼭질하며 빵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책보를 둘러메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던 시간은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에 행동이 굼뜨고 게을렀다.
작은형은 학교에서 준비물을 가져오라면 꼬박꼬박 챙겨 갔다. 그에 비해 나는 어머니 눈치를 살피다가 등교 시간이 늦을 것 같으면 준비물을 챙기지 않고 그냥 학교에 갔다.
형과 연년생이라 학교에서 걸레나 빗자루 등을 가져오라는 날이면 항상 준비물이 겹쳤다. 부모님은 일이 바빠서 저녁에 학교에서 가져오라는 준비물을 챙겨줄 시간이 없었다.
이튿날 아침 등교 시간이 되어 어머니에게 학교에 가져갈 준비물을 말씀드리면 만들 시간도 부족하고 설사 준비물을 만든다 해도 등교 시간이 늦을 것 같아 준비물을 챙기지 않고 학교에 갔다.
사람은 행동이 느리면 마음도 느린 것 같다. 당시 마을에서 등교는 늘 마지막에 나섰다. 집이 마을 초입에 있어 친구들이 학교 가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중에 양달마을에 나처럼 행동이 느린 형이 있는데 그 형이 학교 가는 모습을 보면 나도 서둘러 준비해서 출발했다. 집을 나서자마자 학교에 늦지 않기 위해 정신없이 뛰어갔다. 그렇게 한참을 뛰어가면 연평이나 새말쯤에서 형들이나 친구들을 만났다.
학교에 가다 종종 새말 모롱이에 이르러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고는 학교에 지각하지 않기 위해 비지땀을 흘리며 뛰어가곤 했다.
아무리 힘들게 뛰어가도 선생님은 항상 교실에 먼저 와 계셨다. 그 시절은 공부는커녕 학교에 가는 것조차 버거웠다. 그저 시계추처럼 책보를 어깨에 둘러메고 학교를 오고 가는 것에 만족했다.
집에서 학교까지 길이 멀어 걸어가는 것도 힘이 들었고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재미에 빠져 나중에 커서 어떤 사람이 되겠다는 꿈도 꾸지 않았던 것 같다.
초등학교 시절은 공부보다 친구들과 운동장으로, 황톳길로, 개울가로, 뒷동산으로 놀이를 찾아다니기에 바빴다. 그리고 집에서 학교를 오고 가는 새말과 학교 중간쯤에 다리 하나가 놓여 있다.
그 다리는 일제 강점기에 놓은 것인데 비가 많이 올 때는 다리 위로 물이 흘러넘쳤다. 이 다리는 학교에서 선생님이 다리 위와 아래에 사는 친구들을 구분하는 잣대가 되었다.
지금도 그 다리는 그대로 있지만, 초등학교 시절엔 비가 유난히 많이 왔다. 여름에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선생님은 다리 위에 사는 학생들이 집에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몰라 수업 중에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런 날은 책보를 어깨에 둘러메고 비닐을 양팔 높이 치켜들고 집을 향해 뛰어갔다. 그렇게 비를 맞고 집에 온 날은 책보를 풀어놓고 아궁이 앞에 앉아 비에 젖은 교과서를 말리곤 했다.
그러다 나중에는 책이 비에 젖지 않도록 책보를 여자들처럼 허리에 단단히 두르고 뛰어갔다. 가끔 선생님의 수업을 듣는 시간이 싫증 나거나 먹구름이 잔뜩 낀 날은 교실 밖을 내다보며 비가 쏟아지기를 기도했다.
나의 기도가 하느님의 귓전에 닿았는지는 몰라도 비를 많이 내려주어 수업 도중에 집에 가곤 했다. 비가 쏟아지는 날은 비를 조금이라도 덜 맞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황톳길은 고무신을 신고 뛰어가면 흙과 흙탕물이 신에 들어와 발이 미끄러워 뛸 수가 없었다. 그런 날은 양말을 벗어 주머니에 꾸겨 넣고 고무신을 맑은 물에 깨끗하게 씻고 바짓단을 돌돌 말아 무릎 위까지 최대한 잔뜩 걷어 올렸다.
그리고는 책보를 허리에 단단히 옭아매고 양손에 비닐 모서리를 잡아 치켜들고 집을 향해 뛰어갔다. 초등학교 시절은 공부를 잘해서 칭찬을 받기보다 준비물이나 숙제를 하지 않아 체벌을 더 많이 받았다.
선생님에게 유일하게 잘한다고 칭찬을 받은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다. 신중현 선생님은 공책에 쓴 글씨를 보고는 글씨를 잘 쓴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그 일은 선생님이 내 머리를 쓰다듬은 마지막 일이 되었고, 그 이후에는 회초리나 출석부가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공부도 잘하지 못했고, 운동에도 소질이 없고 게다가 그림이나 서예와 같은 예술에 대한 재능도 없었다.
따라서 내가 선생님 눈에 띄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글씨를 잘 쓴다고 칭찬해 주시던 선생님은 그해 학기가 끝나고 다른 학교로 전근 가셨다.
그리고 초등학교 5학년 때 선생님이 생활기록부에 체력 상태를 기재하기 위해 친구들의 체력을 측정했다. 체력측정에는 턱걸이, 100m 달리기, 제자리 멀리 뛰기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중에 운동장 몇 바퀴를 뛰는 장거리 달리기가 있었다. 그 측정은 반 친구들을 한꺼번에 운동장을 뛰게 해서 측정했다. 평소 집에서 학교까지 자주 뜀박질을 해서 그날은 장거리 달리기에서 일등을 했다.
그러자 선생님은 체육을 맡은 선생님에게 마라톤 선수로 추천해서 학교를 대표하는 선수로 선발되었다. 당시 학교에서 체육부는 정승택 선생님이 맡아 관리했다.
그 선생님은 육상부 학생들의 도시락까지 싸 오면서 운동을 가르쳤다. 사실 나는 마라톤을 뛰는 연습이 싫었다. 마라톤을 뛸만한 체력도 몸도 갖추 지를 못해서다.
그리고 집이 멀어 운동을 끝내고 늦게 가는 것도 싫었다. 그에 따라 학교 운동장에서 마라톤을 연습하다 기회가 되면 집으로 도망을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에게 마라톤을 그만두겠다고 말하자 선생님이 화를 내면서 심하게 때렸다. 몸의 이곳저곳을 선생님에게 두들겨 맞았더니 마라톤 연습이 더욱 싫어졌다.
그날 이후 학교에서 연습하는 마라톤이 잘 될 리가 없었다. 그 과정에서 체육부를 맡은 담당 선생님이 바뀌고 진천상산초등학교에서 열리는 진천군민 체육대회에 학교를 대표해서 어머니와 함께 참가했다. 나는 운동장 한 바퀴 돌고는 뛰는 것을 포기하고 마라톤을 그만두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공부도 운동도 무언가 하나에 집중하지 못했다. 공부나 운동보다 학교 앞 가게에 가서 과자를 먹기 위해 친구를 기다리고, 버드나무 가지가 휘휘 늘어진 계단에 앉아 빵 차를 기다리며 식탐을 즐기고, 학교보다는 집을 오고 가는 길에서 보낸 시간이 더 많았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철없던 개구쟁이 시절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친구와 남의 밀이나 보리밭에 들어가 뛰어다니다 주인에게 들켜 도망을 다니거나, 길옆에 심어 놓은 코스모스나 꽃을 뽑다가 아랫마을 누나나 어른들에게 들켜 혼나지 않으려고 도망을 다녔다.
당시 철없는 행동으로 아랫마을 누나나 어른들을 괴롭히며 보낸 시간을 생각하면 죄송한 마음이 든다. 앞으로 그 시절로 되돌아갈 수 없지만, 아쉬움과 미련과 후회하는 마음이 진득하게 남아 있다. 너무 늦은 감이 있지만, 그때 철없이 한 행동한 것에 대해 용서를 빌고 진심으로 사죄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