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주는 생명의 꽃이요 근원의 물줄기를 이어가는 징검다리다.
봄이 되자 매화꽃, 산수유꽃, 개나리꽃, 목련꽃이 순서대로 피어난다. 내가 봄을 좋아하는 이유는 겨우내 빈 몸이던 나뭇가지에 함초롬히 솟아오른 꽃을 볼 수 있어서다.
봄날에 핀 꽃을 바라보면 마치 손주의 해맑은 웃음처럼 꽃에서 전해져 오는 환한 꽃내음이 잔잔한 미소를 짓게 한다.
지난해 딸이 손주를 낳았다.
집안에 손주가 태어나자 모두가 바빠졌다. 주말이면 만사를 제쳐 두고 딸네 집에 봄꽃을 만나러 간다.
딸네 집에 들어서면 먼저 손을 씻고 나와 손주가 무엇을 하고 노는지 살펴본다. 손주가 분유를 먹고 놀고 있으면 번쩍 안아 올린다.
손주는 품에 안기는 순간부터 몸짓과 표정을 지으며 연신 방긋방긋 웃는다. 손주가 품에 안겨 몸짓과 발짓을 해가며 웃는 모습은 마치 봄날에 핀 봄꽃과도 같다.
딸은 결혼 후 수년 만에 손주를 낳았다. 아내와 나는 두 번의 유산 끝에 딸을 얻었다. 그런 고통과 시련을 거쳐 손주를 만났으니 반가움은 봄꽃에 비할 바가 아니요 기쁨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다.
아기는 여린 꽃이라더니 맞는 말인가 보다.
나무에 핀 꽃은 바라볼수록 꽃 속에 빠져들듯이 손주도 방긋방긋 웃는 모습을 바라보면 한없이 빠져든다.
손주를 품에 안으면 머릿속은 저절로 딸을 품에 안고 사당동 주택가를 거닐던 시절이 떠오른다. 나이 들어 그런 것인지 딸과 손주를 품에 안아보는 감정이 사뭇 다르다.
손주가 더 귀엽고 사랑스럽다. 삶이란 무게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서 그런지 딸보다 손주가 더 애틋하고 앙증맞다.
봄꽃이나 손주는 사랑에 의해 탄생했다. 어떤 꽃이 사랑스럽고 귀여운지는 바라봄이 아닌 돌봄이란 사랑의 행위로 판단해야 한다.
자식에 대한 내리사랑이 손주로 기우는 것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손주는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근원의 모태다.
내 부모님도 나와 같이 손주를 사랑하셨을까. 할아버지가 되어 손주를 보고 느끼는 감정을 부모님도 같이 느끼셨을까.
딸을 품에 안고 서성이던 시절 낮과 밤이 바뀌어 몸과 마음고생이 심했다.
그럼에도 손주를 품에 안고 딸에게 "너 키울 때는 이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는데 손주를 안아보니 더 깊은 애정이 생기네."라는 말이 불쑥 튀어나온다.
지금에 와서 딸을 어떻게 키우고 재우고 했는지 하는 소소한 일은 기억나지 않지만, 손주를 품에 안고 돌아다니면 지난 시절 일이 무시로 떠오른다.
손주로 인해 부모와 나를 연결 짓고 근원을 돌아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핏줄의 사랑이다. 부모와 나와 딸과 손주는 한 뿌리의 자손이자 후손이다.
그러고 보니 딸이나 손주 모두 내 자손인데 서로 비교하는 것은 자제해야겠다.
손주도 딸네 아파트 단지 앞뜰에 봉긋이 핀 하얀 목련꽃처럼 화사하게 삶을 꽃피우며 평안하고 건강하게 살아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