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구봉산 능선 길을 올라가는데 어디선가 향긋하고 비릿한 냄새가 진동하면서 후각을 자극한다. 유월은 산자락에 핀 밤꽃 내음이 풋풋한 향기를 피우며 욕망을 분출하는 달이다.
밤꽃의 짙은 향기를 맡을 때마다 고향에서 보낸 시절이 풍경처럼 떠오른다. 고향의 초가에는 앞뜰에 배나무와 자두나무와 대추나무가 자랐고, 뒤뜰 언덕에는 초가를 덮고도 남을 만한 커다란 밤나무가 자랐다.
초가는 유월이 되면 밤꽃 향기로 가득했다. 그리고 가을에 밤이 영글면 아버지가 긴 장대를 들고 밤나무에 올라가서 밤을 털면 가족 모두가 나와서 알밤을 줍곤 했다.
초록이 짙어가는 산자락에 밤꽃 향기가 짙어지면 그 시절이 떠오르고 가족과 함께 밤송이 까시에 머리를 맞아가며 밤을 줍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초가에서 태어나 초등 고학년이 될 때까지 밤을 줍던 시절이 그립고 아련하다.
밤꽃의 꽃말은 '희망'이다. 밤꽃과 희망은 서로 어울려 보이지 않으면서도 어울리는 단어란 생각이 든다. 밤꽃은 강아지 풀처럼 여러 갈래로 기다랗고 소담하게 핀다.
꽃말이 '희망'인 이유는 나중에 영근 알밤을 만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붙인 것 같다. 고향의 초가에서 유월이면 맡던 향긋한 냄새와 가을의 알밤도 초가가 무너지고 아랫마을로 내려오면서 끝이 났다.
사람은 유년 시절에 보거나 만났던 풍경이나 모습이 오래도록 머릿속에 각인되나 보다. 유년 시절에 맡았던 밤꽃 냄새는 내 머릿속에 영원히 각인되어 밤꽃만 바라보면 고향의 초가를 뭉글뭉글 떠오르게 한다.
신록이 무르익어가는 유월에 밤나무에서 꽃이 피면 산에 피는 봄꽃도 끝이 난다. 오월에 아카시아꽃이 화려하게 피었다가 지고 유월에 밤나무가 진한 향기로 꽃을 피우고 나면 더 이상 산자락에서 피는 꽃을 만날 수 없다.
어쩌면 밤꽃은 산자락에서 사라지는 것이 두려워 진한 향기를 피워 새와 벌이 찾아오도록 향기를 피우나 보다. 내게 밤꽃은 유년의 꽃이요 성장하던 시절의 희망과 꿈을 오롯이 간직한 향기와도 같다.
유월의 밤꽃이 지고 나면 본격적인 여름철이 시작된다. 밤꽃이 짙은 향기를 피우는 것도 무더운 여름을 잘 보내라는 의미에서 몸부림의 향기를 피우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느덧 봄꽃과 함께 찾아왔던 봄날의 따뜻한 기운도 여름의 무더위를 향해 이울어 간다. 계절이 이우는 것은 어쩔 수 없다지만 눈앞에서 사라져 가는 시간이 그저 아쉽고 그립고 애틋하기만 하다.
계절이나 사람이나 가고 오는 것이라지만 가는 계절과 떠나간 사람이 더 보고 싶은 이유는 무슨 연유일까. 아마도 밤꽃과 같은 진한 향기를 남기지 못해서 더 서운한 것은 아닐까.
매년 맞이하는 유월이지만 올해는 유난히 가는 유월이 그립고 아쉽기만 하다. 밤꽃의 꽃말처럼 아직도 희망을 찾지 못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유년 시절에 꾸었던 꿈을 이루지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