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덫

by 이상역

가는 세월이 야속하기만 하다. 무정하게 흘러가는 물을 막을 수 없듯이 무심하게 가는 세월도 막을 수는 없다. 나이 들어서야 가는 세월이 야속하다는 뜻과 의미가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우리 곁에서 흘러가는 시간은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길을 찾아 앞만 보고 간다. 가는 세월을 어느 정도 겪고 나자 몸의 움직임도 둔해지고 기억과 생각도 더뎌지고 사물에 대한 판단력도 흐려졌다.


이곳에 이사 온 지도 그럭저럭 일 년이 되어간다. 그런데 일 년 이 아닌 몇 해 전에 와서 사는 듯한 기분이 든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삶에 대한 현지 적응력빨라지는 것 같다.


그간 뿌리를 내리고 살던 둥지를 떠나 다른 곳으로 이사 가면 적응해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다. 집과 사람, 교통과 시장, 환경과 지리 등 적응해야 할 것이 수 없이 많다.


하지만 이곳은 마치 몇 년 전에 적응된 것처럼 모든 것이 익숙하다. 무슨 특별한 인연이 있어 이곳으로 이사를 온 것은 아니지만 내게 다가오고 부딪히는 것에서 그런 느낌이 든다.


지금 무료하게 겪어내는 순간과 시간은 나중에 세월이란 묶음에 테두리를 형성한다. 그렇다고 순간순간 찾아오는 찰나의 시간을 알차게 보내고 싶어도 마음만 앞설 뿐 몸이 나서지를 않는다.


시간은 찰나라는 순간 열차를 타고 한고비 한고비 넘어가는 언덕과 같다. 가는 시간을 우두커니 바라만 볼 뿐 가는 도중에 뒤를 돌아보거나 가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을 남기지는 않는다.


직장을 물러나서 사회인이 되자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간다는 생각이 든다. 하루가 한주가 한 달이 어떻게 가는지도 오는지도 모르게 지나가버린다.


그런 시간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듯이 내 삶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지 모르겠다.


삶의 분명한 목적을 품고 살 때는 시간을 아껴 쓰고 계획적으로 행동했는데 목적이 사라지자 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허둥대기만 한다.


사람은 주변에 어떤 올가미를 매고 가느냐에 따라 삶의 흐름과 행동이 달라진다. 사람의 몸과 행동을 규제하는 올가미는 없는 것보다 차라리 있는 것이 몸과 행동에 더 좋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의 행동과 마음을 옥죄는 올가미는 귀찮게도 하지만 행동과 마음을 통제하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지금은 나를 옥죄는 올가미도 없고 생활이 불규칙해서 무언가에 자꾸만 기대고 의지하려는 마음만 생겨난다.


직장에 다닐 때는 국가라는 울타리를 넘거나 위반하면 안 된다는 관념에 따라 행동과 마음을 자제했다. 지금은 그 틀이 사라지자 무엇을 위해 살아갈 것인지 자제력을 잃곤 한다.


사람은 생애 주기에 따라 바라보는 것이 달라진다. 세상에 갓 태어난 아기는 부모만 바라보고, 학창 시절에는 부모와 학교만 바라보고, 직장에 다닐 때는 부모와 직장과 사회만 바라보고 산다.


그러다 직장을 나오면 부모도 직장도 사회도 아닌 오롯이 자신만 바라보게 된다. 자신만 바라보고 살라는 것은 그간 보내온 세월을 돌아보며 인생을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지 생각하라는 메시지다.


가는 시간이 덧없이 흘러가도 순간순간 맞이하는 찰나의 시간 앞에서 가끔은 정신을 차리고 자신이 가는 길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가는 시간이 서운해하거나 아쉬워하지 않는다.


오늘도 시간이란 덫에 갇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노트북 화면만 멍하니 바라보며 허송세월을 보내는 중이다. 비록 시간을 헛되이 보내도 깨알 같은 작은 깨우침 하나라도 건질 수 있는 날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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