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물 젖은 자화상

by 이상역

인생에 노래가 없다면 얼마나 심심하고 무료할까. 어떤 노래나 사연 없는 노래가 없듯이 노래는 사람의 삶을 살찌우고 풍성하게 한다.


삶이 힘들거나 고된 일로 피곤해질 때는 흥겨운 노랫가락을 부르면 힘과 흥이 솟아난다. 노래가 힘을 솟게 하는 것이 아니라 노래에 담긴 정서와 풍류가 감정을 툭툭 건드려서 힘이 솟는 것이다.


어제부터 내리는 비가 이튿날 아침까지 이어져 내린다. 비가 오는 날에는 구봉산에 올라가지 않아도 되는데 굳이 고집을 부리며 한 바퀴 돌고 내려온다. 몸에 밴 습성은 습관대로 움직여야 하루의 생활이 순조롭다.


구봉산을 올라가는데 오솔길에 흙탕물이 모여 계곡 아래로 흘러가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물은 사람의 실핏줄처럼 작은 것이 모이고 모여서 물줄기를 형성해서 낮은 곳을 향해 간다.


비가 내리니 능선 길의 물웅덩이를 피하지 않고 운동화를 적셔가며 걸어가자 가로막아 서는 장애물이 없다. 숲길을 첨벙첨벙 대며 걸어가는데 걸어가는 곳마다 흙탕물이 물줄기를 이루어 아래로 아래로 향해 간다.


실핏줄 같은 물줄기가 모여 시냇물을 이루고 시냇물이 모여 강물을 이루고 강물이 모여 바다가 된다. 물이 바다로 가는 여정은 마치 사람의 삶과도 비슷해 보인다.


어떤 삶이나 과정이 없는 결과물은 없다. 세상에 태어난 모든 것에 사연이 있듯이 과정 없이 이루어지는 것도 없다. 계곡에서 물줄기를 이루어 흘러가다 점점 커다란 물줄기를 형성하는 것은 물의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사람도 한 사람이 모여 여럿이 되고 여럿이 모여 도시를 이룬다. 도시는 한 사람이 만들 수는 없다. 여럿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 도시이고 도시를 구성하는 근간은 사람이다.


비가 내리는데 능선 길을 걸어가며 구슬픈 노래를 부르며 걸어갔다. 비가 내려 사람들이 나올 것 같지 않았는데 장맛비가 내려도 산에 나올 사람은 나와서 걷는다.


비가 내리는 날은 노래 부르기가 좋다. 빗소리에 노래가 흡수되어 크게 목소리를 내어 불러도 멀리 가지 않고 노래를 불러도 다른 사람이 잘 알아듣지를 못한다.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이면 고향집 대청마루에 대자로 누워 종일토록 노래를 부르던 기억이 난다.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는 고독한 고향집에서 누가 들어주는 사람도 없는데 구슬픈 노랫가락을 불렀다.


그때를 생각하며 구봉산 능선 길을 걸어가며 노래를 불러본다. 그런데 노래 가사가 생각나지 않아 한 노래를 시작해서 다른 노래로 끝이 나거나 무슨 노래인지도 모르는 노래가 중간중간 끊기며 이어진다.


나이는 속일 수 없듯이 나이를 먹으니 기억력이 감퇴되어 노래 하나 완창하지 못한다. 능선 길을 거닐며 부르는 노래도 몇 곡 되지 않는데 그나마 가사를 잊어버려 내가 부른 노래의 제목을 알지도 못하고 부르기만 한다.


우산을 받쳐 들고 노래가 뒤엉킨 구슬픈 노랫가락을 부르니 빗물과 함께 황톳물에 노래가 스며든다.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소리는 여전히 소란스럽고 내가 부르는 노랫가락이 빗물에 젖어드니 마음이 처량해진다.


능선 길에서 노래를 부르지 않고 조용히 걸어가면 처량해 보이지는 않을 텐데. 처량한 사람처럼 노래를 부르며 능선 길을 걸어가니 내 신세가 빗물보다도 더 처량하게 바라보인다.


나를 처량하게 만든 것은 내가 아니라 빗물에 젖어가는 나의 자화상 때문이다. 우산을 들었으나 들지 않은 사람보다 비를 더 맞아 측은해 보이고, 그냥 걸어가지 않고 노래를 부르며 걸어가니 그 모습이 처량해 보일뿐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빗방울에 맺힌 추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