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신호등(수정)

by 이상역

사람은 살면서 수많은 선택에 직면한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고 선택에는 고민과 갈등이 따른다. 신호등은 색깔에 따라 멈추거나 가야만 한다. 삶도 마찬가지다. 삶이란 신호등에 빨간불이 들어오면 멈추고, 파란불이 들어오면 가야 한다.


고향의 동구에는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푸른 신호등이 자란다.


푸른 신호등 안쪽은 내가 태어나서 성장한 고향이고, 바깥쪽은 현재 살아가는 타향이다. 삶을 돌아보니 고향에 터전 삼아 산 것은 스물여덟 해이고, 타관을 떠돌며 살아온 것은 사십 년이 되어간다.


타관에 나와 삶의 시련과 고비를 만날 때마다 동구의 푸른 신호등을 떠올리며 마음의 시름을 달랬다. 가끔 동구의 신호등을 만나기 위해 언덕을 향해 몸을 저어갈 때면 가슴에는 동심의 샘물이 샘솟는다. 그러다 고향을 등지고 언덕을 내려올 때면 몸 안에는 흰 파도의 거품처럼 허전함이 가득해진다.


내 삶의 시기는 신호등의 기울기에 따라 작동한다. 신호등 안쪽으로 들어설 때는 현재에서 과거로 돌아가고, 바깥을 향해 등지고 나올 때는 다시 과거에서 현재로 돌아온다. 지금까지 고향을 들고 나는 세월이 육신의 나이테를 부풀렸다. 나잇살이 겹 쌓이면서 삶은 신호등 안과 밖에서 나누어 살아갈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푸른 신호등이 선 동구는 내 영원한 안식처이자 고향이다. 그곳에는 부모님의 성근 냄새와 나를 성장시킨 바람이 깃들어 있다. 타관에 몸을 기대고 살아가는 신세지만 언젠가는 푸른 신호등 곁으로 가야만 한다.


내 삶은 오롯이 공직이란 푸른 신호등을 고집하며 살아온 것 같다.


고교 졸업 후 재수하다 지방직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서 읍사무소에 근무하다 대학에 가기 위해 사표를 내고, 대학 졸업 후 출입국관리직에 합격해서 김포공항에 근무하다 다시 공직을 가기 위해 사표를 냈다.


그리고 뒤늦게 국가직에 합격해서 부처를 교류하며 근무하다 퇴직했다. 삶에서 공직이 아닌 다른 직업을 선택해서 가는 길도 많았는데 왜 하필 공직의 길만 고집부리며 살아온 것일까.


공직에도 “남의 떡이 커 보인다.”라는 속담이 그대로 작용한다. 국가직에 합격해서 국방부에 첫 발령을 받고 근무 여건이 좋지 않아 교육부로 자리를 옮겼다. 그런데 수능 비리로 평가원이 폐지되고 교육부에 근무하다 지인의 도움으로 국토부로 자리를 옮겼다.


그간 부처를 이동하며 느낀 것은 자신이 근무하는 부처의 좋은 점은 들여다볼 줄 모르고 단점만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자신이 근무하는 부처는 싫은 점이 부각되고 다른 부처로 가려는 핑계만 늘어났다. 다른 부처는 근무 여건이나 조건이 괜찮아 보이고 대우도 제대로 해줄 것이란 착각과 환상에 빠져든다.


중앙부처는 부처마다 나름의 특성이 있고, 장단점을 파악해서 가야 한다. 그런 속사정도 모르고 “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속담처럼 등잔 밑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부처만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


인생의 고비마다 오뚝이처럼 나를 일으켜 세운 것은 시험이다. 막막한 불안과 불확실한 시간을 확실한 길과 시간으로 안내해 준 것도 시험이다. 그나마 시험이 없었다면 지금쯤 어떤 길을 가고 있을까.


푸른 신호등이 자라는 동구의 언덕에 서면 지나온 삶이 시시때때로 교차한다.


삶의 고비마다 선택이 기다렸다. 고향에 살 것인가 등지고 살 것인가, 대학에 진학할 것인가 포기할 것인가, 부처를 이동할 것인가 그대로 근무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의 순간이 다가왔다.


그때마다 어떤 방향을 선택해서 갈 것인가 고민과 갈등이 따랐다. 그런 선택의 순간을 돌아보니 삶은 한 방향만을 선택해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어떤 것을 선택해도 그것이 옳다 그르다는 판단을 내릴 수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사람은 자신만의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사막을 건너가듯이 인생도 자신이 선택한 고난의 길을 따라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 삶에서 자신은 남보다 특별하고 남과는 다르다는 환상과 착각 속에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이제는 무언가 선택해야 하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싶다. 삶이란 신호등에서 파란불보다 빨간불을 선택해서 잠시 멈추고 지난 시절을 돌아보며 여유롭게 살아가고 싶다. "내 영혼아! 그동안 고생했다."


오늘의 나는 푸른 신호등을 선택해서 이루어진 현현이다.


그간 두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던 공직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을 훌훌 털어내고 싶다. 그리고 깃털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고향의 동구에 선 푸른 신호등을 찾아가서 내가 없는 동안 신산한 삶을 잘 참고 견디며 살아온 것에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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