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을 등지고 나온 지도 어느덧 불혹이 되어간다.
불혹의 기간에 고향을 종종 찾아갔지만 갈 때마다 정겨운 것은 옛길에 대한 기억이다.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은 그리 많지 않지만 옛길의 풀숲에는 고향을 떠나올 때 남긴 추억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고향의 동구에는 하늘을 향해 기지개를 켠 시냇가 느티나무와 산자락에 소나무가 자란다. 그들을 바라보며 동심의 꿈을 키웠고, 낯선 곳을 동경하는 시원도 품었다.
그러다 언덕 너머 낯선 곳에 나오자 동구 안과 밖에서 일어나는 바람이 달라졌다. 내가 고향을 등지고 나오자 동심의 언덕은 마을과 고장을 가르는 잣대로 변했다.
동구 주변의 풀은 무성해졌고 길은 황토색에서 검은색으로 변했다. 나선형이던 옛길은 넓어졌고, 길도 곡선에서 직선으로 누워 오고 가는 사람을 반겨준다.
동구의 언덕은 내게 세월의 풍화작용을 가르쳐 준다. 고향에 들어갈 때는 지금의 나이에서 유년의 나이로 돌아가고, 고향에서 볼 일을 보고 언덕을 내려올 때면 현재의 나이로 돌아온다.
세월이 깊어갈수록 그 언덕은 점점 멀어져만 간다. 유년의 언덕은 낯선 세상을 연결해 준 디딤돌이자 힘든 삶의 원기를 회복시킨 소망의 언덕이다.
고향의 옛길은 익숙한 서정과 풍경이 되어 지나간 시절을 불쑥불쑥 들추어낸다.
고향 집을 나서면 옛길로 이어진다. 마을 입구의 비석거리를 내려서면 주변의 계곡에서 새소리와 개구리울음소리가 교향곡처럼 들려온다.
옛길에서 새소리를 들으며 시원한 바람을 맞으면 마음이 상쾌하다. 주위를 둘러보면 연두색 신록과 길옆에 모를 심은 논과 고추와 옥수수를 심은 밭이 층층 계단을 이룬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지난 시절엔 풍경으로 다가오지 않더니 나이 들어 마주하자 새롭게 다가온다. 옛길이 아스팔트로 포장되고 넓어지면서 흙길의 추억도 사라졌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아름답다는 말처럼 옛길에서 느꼈던 정취를 아스팔트에서도 풍겨 나온다. 나도 어느덧 삶의 풍경을 그리움으로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이제는 나이테가 두터워지는 서글픔보다 뒤늦게 옛길에서 만났던 그리움을 다시 바라보고 만날 수 있도록 기회를 준 것에 감사드린다.
고향에서 잠을 자는데 한밤중에 비 오는 소리가 잠결에 꿈결처럼 들려왔다.
이튿날 아침 방문을 열어젖히자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우산을 들고 길을 나서자 주변의 산자락에 안개가 진득하게 깔려 마중을 나왔다.
가랑비와 안개를 바라보며 아랫마을로 향했다. 산자락에서 안개가 연기처럼 솟아오른다. 신록에 가랑비가 스며들자 청소를 한 듯이 깨끗해졌다.
어제 본 것도 밝아졌고 녹색과 연두색은 더 옅은 색으로 채색되었다. 하룻밤 자고 나자 온 세상이 달라지고 신선해졌다.
아랫동네 삼거리에 이르러 친구의 하우스를 열고 들어서자 친구가 수박 솎기를 하고 있다. 잠시 후 하우스 밖에 나와 친구와 커피 한잔 마시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친구와 초중고를 같이 다녀 공유하는 추억도 많다.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봄비와 추억도 대지로 천천히 스며든다. 친구가 수박 속기를 해야 해서 친구가 준 수박 몇 개를 손에 들고 헤어졌다.
고향의 옛길 따라 윗상거리에 다다르자 다른 친구 어머니를 만났다. 아주머니께 인사를 드렸더니 아저씨가 삶의 한고비를 넘겼다며 한숨을 쉬신다.
모처럼 친구와 아주머니를 만나 인생에 대한 많은 것을 나누었다. 그 노래에는 성장하던 시절의 추억도, 생명을 마감하는 인생의 슬픈 곡조도 들어있다.
고향의 옛길은 나를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걷게 하는 징검다리다. 그 길은 내게 고향으로 가는 길이요, 부모님을 만나러 가는 그리운 길이다.
비탈진 옛길을 거닐면 유년의 꿈과 고향을 등지고 나온 아스라한 옛이야기가 계곡에서 바람을 타고 아름다운 노래로 들려오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