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산책을 가는데 구봉산 아래 아파트 옆 골목길에 들어서자 노란 은행잎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은행잎을 사뿐사뿐 밟고 걸어가자 자박자박 낙엽 밟히는 소리가 귓전에 울려 퍼진다.
아파트 단지 울타리에 심은 은행나무잎이 노랗게 물들었다. 근 백 여미터에 이르는 골목길에 노란 은행나뭇잎이 떨어져서 살랑거리며 날아다닌다.
가을은 나뭇잎을 물들이는 만산홍엽의 계절이다. 은행나무는 노랗게 단풍나무는 빨갛게 느티나무는 주황색으로 물들어 간다. 나뭇잎이 물든 자연의 모습을 바라보면 발걸음이 한없이 가벼워진다.
구봉산에 들어서자 갈참나뭇잎이 발자국을 내디딜 때마다 '바스락바스락' 거리며 소리를 낸다. 발에 밟히는 낙엽의 소리도 제각각이다. 낙엽이 작으면 소리가 옅고 낙엽이 크면 소리가 짙고 굵다.
산자락의 능선 길과 길가의 인도에도 낙엽이 춤을 추며 날아다닌다. 구봉산을 내려와 도로를 건너 승상산을 올라가는 능선 길에도 갈참나무잎이 수북이 쌓여 바람에 이리저리 춤을 춘다.
능선 길에 쌓인 낙엽을 밟자 '부스럭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난다. 가을을 가을답게 꾸미는 것은 단풍 바람이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나무 꼭대기에서 아래로 산의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향해 단풍이 파도를 친다.
능선 길을 한걸음 한걸음 올라갈 때마다 나무에서 낙엽이 빙글빙글 춤을 추며 떨어진다. 땅을 향해 떨어지는 낙엽이 바람에 휘감겨 둥치를 맴돈다.
마치 노랫가락이 자진모리에서 휘모리장단으로 바뀌듯이 낙엽도 땅에 가까워질수록 중력의 속도를 높이며 떨어진다. 생명을 다하고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니 나무가 한 해 동안 공들였던 생명의 힘이 저문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도 언젠가 땅에 떨어진 낙엽처럼 흙으로 돌아간다. 삶은 공수래공수거라 하지 않았던가. 이 세상에 빈 손으로 왔으니 빈 손으로 가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참나무가 자라는 곳에는 참나무잎이 플라타너스가 자라는 곳에는 플라타너스잎이 땅에 떨어져 거리를 배회한다. 낙엽은 어떤 크기와 모양으로 태어나느냐에 따라 세상에 머무는 시간이 다르다.
낙엽이 큰 것은 사람과 바람에 이리저리 밟히다 빠르게 사라지고 작은 것은 사람과 바람을 요리조리 피해 다니며 오래도록 머물며 천천히 사라진다.
승상산 능선 길을 올라갈수록 단풍이 진하게 물든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단풍을 보기 위해 산에 올라가는 것은 아니지만 눈에 들어오는 것 모두가 울긋불긋한 단풍이니 아니 볼 수도 없다.
이 세상을 좋은 것만 바라보며 살아갈 수 없듯이 산을 올라가는 등산도 멋진 단풍만 바라보며 오를 수는 없다. 세상에는 멋과 추함이 함께 공존하듯이 나뭇잎이 곱게 물들었다 낙화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산을 올라가며 제일 즐겁게 듣는 것은 낙엽을 밟는 소리다. 산에서 아무도 나를 반겨주는 이가 없는데 낙엽이 나그네 마음을 알아주듯이 '바스락바스락' 소리를 낸다.
요즈음 매일 산책 겸 운동 삼아 산자락에 오른다. 등산이 본래의 목적이 아니고 오롯이 몸을 위한 산행에서 많을 것을 배우고 깨닫는다.
집을 나올 때 단풍과 낙엽이 반겨주었듯이 산자락 정상에 올라가도 단풍과 낙엽이 웃으며 반겨준다. 단풍의 계절인만큼 단풍과 낙엽을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런 낙낙한 계절에 단풍을 바라보며 낙엽 밟는 소리를 들으며 보내는 하루가 소중하고 아름답기만 하다. 나태한 마음을 깨우치는 것은 집을 나설 때가 아니라 산자락 정상에 섰을 때다.
집을 나설 때는 오늘도 하루가 시작되는구나 하는 의무적인 마음이지만 산자락 정상에 서면 오늘 하루가 의무가 아닌 새로운 마음과 자세를 갖고 설계하게 된다.
가을에서 겨울을 향해 가니 아침 해가 뜨는 시간이 점점 느려진다. 가을 햇살이 고맙기만 하다. 여름엔 햇빛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는데 가을엔 햇빛을 정면으로 바라봐도 따듯하게 다가온다.
승상산 등산을 마치고 상일동 빌라단지 앞 인도를 걸어가는데 플라타너스잎이 수북이 쌓여 있다. 플라타너스잎은 나뭇잎이 커서 발로 밟을 때마다 '퍽퍽'거리며 소리를 낸다.
산에서 낙엽을 밟는 소리와 인도에서 낙엽을 밟는 소리가 다르다. 인도에는 논에서 벼를 탈곡하고 볏자루를 담아 놓은 것처럼 플라타너스잎을 담아 둔 낙엽자루가 인도와 차도 사이에 놓여 있다.
그 낙엽이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이 발로 밟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낙엽자루를 바라보는 마음이 아프지만 자루에 담아 버리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
낙엽의 거리를 조성해서 낙엽 밟는 가을의 낭만을 느끼도록 배려해 줄 수는 없는 것일까. 낙엽을 밟고 낙엽을 태우고 낙엽을 만지는 것이 가을에 느끼는 진정한 낭만이 아닐까.
이번 가을에는 낙엽 밟는 소리를 들으며 보낼 수 있어 다행이다. 단지 낙엽 밟는 소리는 내가 발로 밟아서 나는 것이 아니라 낙엽이 고통의 몸부림을 치는 소리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