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글쓰기
대통령 선거가 있던 3월. 20대 대통령 선거일을 향하던 그때 윤석열, 이재명, 심상정, 안철수... 이외 여러 후보들이 자신들의 업적을, 자신들의 잘남을 서로서로 앞다투어 알리고 외쳤다. 상대를 낮추고 헐뜯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19대 대통령의 자리에 있던 문재인 분은 후보자들이 그렇게 바라는 높은 자리에서 나라의 일을 담당하고 있었다.
옆집 원이 엄마가 말한다. "그 언니네 소파 바꿨대. 엄청 비싼 걸로."
학부모가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목에 힘을 주어 말한다.
"이렇게 하시면 저는 교육청에 민원을 넣겠습니다. 제 생각에는 제 주장이 맞다고 봅니다."
맞서는 교사가 말한다.
"어머님, 그건 교권 침해에 해당합니다. 저는 제 의견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뭐가 그렇게 잘났는데? 내가 지난번에 그 보험 건은 해지하는 게 손해라고 했지?"
"그 사람 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왜 그러는 거야? 정말 내가 이런 사람 만나서 고생이지."
"나 이번에 땅 산거 두배로 올랐잖아. 그래서 나 이 일 사실 안 해도 돼."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를 높이느라, 상대를 낮추느라 바쁘다.
나의 결혼 생활도 그러하다.
내 높이 상대는 함께 사는 남편.
나를 무시하는 듯한 남편의 말이 기분 나빴다.
자기를 무시하는 듯한 내 말에 그도 화가 났다.
우리 서로는 서로에게 상대를 낮춤으로 나를 세웠다.
"당신은 뭐가 그렇게 잘났는데?"
"당신이나 잘해."
"그러는 당신은 뭐했는데?"
"그래, 당신은 잘났지? 그러니까 당신이 다 알아서 해."
무시를 당한다고 여기고 있던 건 나였는데
상대도 그렇게 느끼고 있다는 것에 놀랐다. 억울했다.
억지다. 내가 가지는 여러 감정들이 상대에게도 안 느껴질 리 없다.
그것을 인지하고 내가 상대를 무시받고 있다고 느끼게 하는 점이 무엇인지 종종 생각했다.
"그럴 수 있겠구나."
다툼이 있던 아니 서로에게 입을 닫던 그날 이후 쌓여가는 서로에 대한 미움이 눈덩이처럼 커지고 과거 것까지 다닥다닥 붙어서 온몸을 짓누를 정도로 커졌다.
터질 것만 같았다. 안 되는 건가? 뒤집어엎어버릴까? 그럼 애들은?
내가 이 가정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렇게 사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건가?
불행한 모습의 부모 곁에서 대화도 없고 서로를 질타하는 모습을 가르치기 위해 이렇게 서로 앙앙거리며 살고 있는 건가? 이렇게 힘들어도 참는 이유가 아이들의 행복이라면 지금 나는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가?
아이들이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서로에게 입을 닫은 부모, 입을 열면 서로에게 언성을 높이는 부모, 화가 나면 참지 못하고 욱하는 부모.
그 아래에서 아이들이 배울 것은? 느낄 것은?
유지의 이유가 없다. 이렇게 괴로운데 유지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멍청한 짓이다. 이유의 목적에 맞지 않게 아이들의 행복을 보장해주지 않는 지금은 아주 멍청한 짓이다.
그래서 다짐했다. 이렇게 괴롭도록 미치도록 유지할 거라면 끝내든지 그러지 않을 거라면 아이들의 행복을 보장해주어야 한다.
그 목적에 맞게 아이들을 행복한 가정에서 자랄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그럼 내가 할 일은?
원망이 아닌 화목이다. 화목한 가정 아래 아이들이 자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내 딸들이 어른이 되어 가정을 이룰 때 기반이 될 수 있는 화목한 가정의 모습을 아이들에게 경험하게 하고 몸에 베이게 만들어야 한다.
지금 우리 부부의 모습이 우리 아이들의 미래 가정에서의 모습이라면 나는 지금의 나보다 훨씬 슬프고 아플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남편과 화해를 신청하기로 했다.
나는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로 했다.
나는 지금 이 가정 유지의 목적인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로 했다.
"화해하자."
저녁 남편에게 "오늘은 외식할까?" 하고 문자를 보냈다. 이에 응하는 남편이 감사하다.
식사 자리에서 남편이 소주 한 병을 시킨다. 얼굴 표정은 여전히 어둡다.
"당신도 한잔할래?"
남편이 건네는 말에 다른 때 같았음 아니라고 했을 나지만 "그래"
따라지는 술잔이 한잔, 두 잔, 세잔.
건네지는 매 잔마다 나는 속으로 이걸 말해? 말아? 아 말이 안 나오네. 할까? 말까? 망설인다.
지난 몇 년간 잘해보지 않은 말, 화해를 신청하는 말
"화해하자"
세 잔째 힘겹게 입을 뗐다.
"화해하자."
짠! 소리와 함께 뱉어진 내 말에 남편은 피식 웃는다.
옆에 있던 아이들이 놀라며 바라본다.
둘째 아이가 "엄마, 아빠 싸웠었어?"
"응, 싸웠어서 오늘 화해하는 거야."
"언제 싸웠었어?"
말없는 부부의 모습이 일상이기에 싸운지도 몰랐던 둘째의 질문이 쏟아지는 가운데 첫째는 아무 말 없이 밥을 먹는다.
첫째는 알고 있었다. 우리가 싸우고 며칠째 말을 안 하고 있다는 것을 그런데 처음 듣는 엄마의 화해라는 말에 반응하지 않는다. 가만히 듣고 가만히 밥을 먹는다. 그 모습에 더 마음이 간다.
아무 말 없이 듣던 첫째가 밥을 다 먹고 나와서 집에 걸어 들어오는 길 그렇게 신나 보일 수가 없다.
둘째랑 매 순간 싸움으로 일관하던 녀석이 동생이랑 뛰어다니며 까르르까르르 이야기를 하며 뛰며 그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다.
그 모습에 "잘했다." 그래 잘했다. 아이들이 다 알고 있었고 그 아이의 마음을 가볍게 해 주었으니 됐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싸우면 이렇게 화해를 하는 것이라 보여줬으니 됐다 싶다.
이렇게 나는 나를 낮추고 먼저 다가감을 실천했다.
그랬더니 남편이 같이 숙여준다. 같이 맞춰준다.
이런 날도 있고 또다시 싸우는 날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경험으로 나는 나를 낮추고 먼저 손을 내미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음을 그리고 그로 인해 얻어지는 좋은 변화들과 배움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나를 낮추어야 할 때 좀 더 쉽게 행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낮추었더니 얻어지는 게 더 많다.
아침 인터넷 뉴스에 실린 문재인 전 대통령의 사진 한 장이 떠오른다.
사진 속 전 대통령의 모습은 하얀 머리에 하얀 수염이 덥수룩이 자라 있고, 흙 뭍은 신발에 편한 옷차림을 하고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개 한 마리의 등에 손을 얹은 편안한 모습이다.
저 높은 곳에 있던 대통령 시절 문재인 분의 모습을 보면 "참 힘들어 보인다." 싶었다.
온 나라의 질타를 받고, 눈초리를 받고, 평가를 받고 높은 곳에서 일들을 해내느라 여유와 편안함이 보이지 않았다. 안쓰러웠다. 그런데 그 높은 자리에서 내려온 현재 오늘 아침 사진 속에서 본 그분은 비로소 "참 편안해 보인다."라는 느낌을 준다.
서로서로 자신을 높여가며 대결하던 20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석열 분께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셨다.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높은 곳의 그분을 볼 때 종종 불안하다는 감정이 든다.
높은 곳은 정상, 최고, 성공, 완성이라는 좋은 단어도 떠올리지만 불안, 부담감, 위험 등의 반대 단어도 떠오르게 한다. 나도 높은 곳의 삶을 동경하며 그곳을 향해야 한다는 불안감에 전전긍긍해왔다.
오늘 아침 그 높음이 과연 아름다운 것인가 라는 의문이 든다.
낮춤도 아름다움을 새삼 깨닫게 된다. 낮은 곳도 아름답고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서로서로 자신을 높이려고 하는 세상 속에서 낮춤은 오히려 아름답다.
낮춤은 편안하다.
낮은 곳에서 보이는 세상도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