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글쓰기
긴 장마에 오늘은 새벽부터 비 줄기가 세차다. 세찬 빗소리에 느지막이 눈을 뜬 딸들의 등교 준비가 바쁘다.
평소에는 혼자 보내는 등교지만, 오늘은 많은 비의 양에 함께 등교를 자청하는 나는 두 딸의 엄마다.
"비 많이 와서 양말 젖을 수 있으니까 여벌 양말 가방에 하나씩 넣어. 그리고 물기 닦을 손수건 챙기고, 바지 젖을 수 있으니까 걷어올리고..." 그리고 함께 우산을 들고 두 딸과 학교로 향한다.
가는 길 몇 발짝 가기도 전에 바지가, 신발이 적셔진다. "물웅덩이 피해서 조심히 와."
둘째는 바지를 한껏 무릎만큼 끌어올려 바지가 젖지 않는다.
첫째는 올려 걷지 않는 바지가 젖어 들어가 조심조심 걷는다. 3학년인 첫째에게는 바지를 올려라 내려라 얘기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아이의 선택에 맡기는 거다.
한참을 조심스레 걷던 녀석이 바지를 걷어 올리고는 뒤에서 걸어온다. 느끼면 스스로 조절하는 거다. 통했다.
교문 앞에서 실내화를 갈아 신고 다 젖은 양말을 교실에서 갈아신으라고 이야기하고는 아이 둘을 들여보낸다.
돌아오는 길 양쪽 바지가 반은 젖고 운동화는 완전히 물에 젖은 신발을 그러려니 하며 걸어오는 길 길에 걸어가는 아이가 평소보다 적음을 인지한다.
요즘에는 다들 차를 가지고 있다. 아빠도 엄마도... 그래서 비가 많이 오거나, 눈이 많이 오거나, 바람이 많이 불거나, 해가 너무 뜨거운 날에는 아이들의 엄마가 아빠가 아파트 단지에 붙어있는 학교임에도 불구하고 차에 태워 등교를 시킨다.
유치원생 아이를 우비를 입혀 우산을 씌워 다 적셔가며 등원을 시키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저 아이의 엄마가, 이 비에 홀딱 젖을 아이를 감안하고 걸어서 등교 등원을 시키는 부모의 마음을 가늠해본다.
"그래 비가 내리면 비를 맞고 흠뻑 적셔도 보고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도 듣고, 비 장화 신고 우비 입고 비를 마음껏 느끼는 즐거움도, 불편함도 모두 느낄 수 있는 기회를 그대로 주고 싶은 마음에 저들은 그냥 차를 태우지 않는 거겠지?" 저들이 모두 나처럼 차가 없을 것이란 생각은 안 한다. 그래서 그들의 의도와 마음을 알아차려본다.
그래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눈이 오면 눈을 맞고, 바람이 불면 바람도 맞고, 해가 뜨거우면 그 열기도 느끼고, 추우면 추위도 느껴보는 것이 아이들의 인생살이에 기본이 되리라.
비를 막고, 눈을 막고, 바람을 막고, 해를 막고, 추위를 막아주는 부모가 진정 아이를 위한 부모의 역할인가 싶다.
우리네 인생살이가 모두 막아진다고 막아지는 인생인가? 막아준다고 평생 막아줄 수 있는 삶인가?
나는 여름 한낮의 뜨거운 햇살에도 부채 들려, 우산(양산) 들려 뜨거운 거리를 걷게 한다. 비가 많이 와 걱정이 되면 같이 가주거나 대처방법을 알려주는 방법을 택한다. 물론 내가 차가 있었다면 비를 막고, 눈을 막아주는 부모가 안되리란 법은 없지만 기본적으로 나의 교육 방침은 그렇다. 더운 것도 추운 것도 세상살이에서 어려운 것도 다 만날 수 있는 이 세상을 막아주지 말고 스스로 경험하고 이길 방법을 살 방법을 찾아내게 하고 싶은 것이 나의 교육방침이다.
아이가 이 세상 살아가며 겪어야 할 수많은 어려움과 역경이 아이들에게 그저 지나가는 또는 잘 헤쳐나가야 할 일임을 알게 하고 그 힘을 길러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라 믿기 때문이다.
어릴 적 부모가 방패막이가 되어 막아주는 모든 경험들과 어려움들이 아이의 성장에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여긴다. 그렇게 부모가 막아주는 방패가 없어지는 그날이 어른이 되어서일지, 청소년이 되어서일지 모르지만 그때의 앓이가 더 심하게 다가 올 아이를 위해 차근차근, 하나하나씩 방패를 거둬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때론 주변의 아이들이 너무 부모로부터 감싸지는 삶을 사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다.
"저렇게 평생 해줄 수는 없을 건데, 저게 아이를 위한 것이 아닌데, 저러다 나중에 아이가 어려움이 닥쳤을 때 스스로 해결하는 법을 못 익힐 수도 있는데, 넘어질 수 있는데, 저건 아이를 위한 게 아니라 부모를 위한 건데."
부모는 아이를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어려움으로부터 막아주고, 해결해주고, 나쁜 건 가려주고, 좋은 것만 보게 하고, 좋은 것만 느끼게 해 주고, 좋은 것만 하게 하고 그게 부모의 역할이라 여기며 충성을 다해 아이를 위한다고 이 모든 걸 행하느라 뼈골이 빠지나 이는 모두 다 부모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나는 부모로서 내 역할 다했다. 나는 내 온몸을 갈아 넣어 너를 키웠다." 이것이 아이를 위한 양육태도인가? 아니면 부모의 부모역할에 대한 자기만족을 위한 태도인가 잘 고민해봐야 할 일이다.
아이 스스로 하게 하고, 스스로 느끼게 하고, 스스로 경험하게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뜨거운데 애들을 걸려서 도서관 다녀왔어요?" "아이 혼자 등교시켰어요? 하여간 언니도 참 대단해."
뜨거운데 함께 걸어서 도서관 가는 나에게, 초등 1학년 아이 혼자 등교시켰다는 말에 주변 엄마들이 나에게 하는 말이다.
차라리 해주는 게 낫지 기다리는 게 더 힘들다. 차라리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시키는 게 낫지 스스로 느끼고 돌아오길 기다리는 게 더 힘들다.
차라리 차에 태워 옷 하나 안 적시고 보내는 게 낫지, 옷 다 젖어 불편하게 학교에서 있을 아이 마음으로 걱정하는 게 더 힘들다.
차라리 뜨거운 햇살에 안 걷게 하고 집에서 에어컨 켜고 티브이 보게 하는 게 더 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편함을 선택하는 건 '아이가 스스로 설 수 있도록 그 방법을 경험하도록 하는 게 부모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사실 세상이 무서워 그렇지 아이 혼자 등교를 못 할 이유도 아이 혼자 동네를 탐색하며 다니는 것을 못할 이유도 없다. 아이들에게는 어른의 생각보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많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일이 많다.
내 아이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아이를 키우길 바란다. 다 막아주지 않아도 아이들은 충분히 잘 해낼 능력이 있다. 그들에게 경험의 기회를 빼앗지 말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