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글쓰기
소년이 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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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여기에서 막혔다.
난, 늘 사랑에서 막힌다.
단 한 번도 '사랑'이 성공이라 여겨본 적이 없다.
상상도 하지 않았다.
난 충분히 사랑을 하고 있다고 여겼다.
두 아이를 낳은 부모이기에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오래 해온 덕에
난 늘 아이들을 사랑으로 대했다고 자부했기에
나에게 사랑은 별게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충분히 그들을 사랑하고 있다고 여겼다.
언젠가 솔로인 언니가 자신에게 '사랑'이라는 게 채워져야 할 것 같다는 말을 했을 때
난 충분히 사랑을 하고 있음을 자신했었다.
그런데...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이라는 찰리 맥커시의 책을 보고 소년의 물음에 '사랑'이라 답하는 두더지가 의아했다. 작가의 결론이 의아했다. 그리고 답답했다. '왜? 왜 성공이 사랑이야?'
'사랑' 그건 부모로서 자식으로서 사회의 한 일원으로써 주변에 대해야 할 당연한 거 아닌가.
그리고 난 늘 사랑을 하고 있다고.
그런데 막히는 구석이 하나 있었다.
난 그 '사랑'을 충분히 느꼈나? 그리고 충분히 사랑받았나?
그러고 보니 난 나를 향한 충분한 사랑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것 같다.
삶이 바쁘고 여려의 자식을 키우던 부모님에게 나는 사랑받고 있는 존재라는 느낌보다는 나는 부모를 힘들게 하는 존재라는 의식을 했었고, 그래서 피해되지 않는 존재로 자리하려 노력했었던 것 같다.
내가 충분히 사랑스러운 사람인지, 나는 충분히 사랑받고 있는 사람인지... 나는 몰랐다.
그래서 '사랑'을 거부했나 보다. 사랑이란 단어를 '사치'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넌 누군가를 진짜 사랑해본 적 있니? 니 남편을 사랑하니? 사랑해서 결혼했니?"라는 질문에 "아니. 난 한 번도 남자를 진짜 사랑해본 적은 없어. 예전 남자 친구도 그냥 그 남자가 좋아해 줘서 만났고, 지금의 남편도 사랑해서 결혼한 건 아니거든."
난 사랑을 몰랐던 거다. 그래서 그게 중요치 않았다.
연인들의 절절한 사랑과 그 사랑에 목매는 상황들이 왜들 저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얼마 전 류승룡, 염정아 주연의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영화를 봤다.
거기서도 '사랑'에 대한 노랫말이 나오고, 첫사랑을 찾아 떠나는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인생 마지막에 찾고 싶을 만큼 첫사랑이 그리도 중요한 건가?
왜 다들 '사랑' '사랑' '사랑' 타령이지?
모든 내용에 공감하고 눈물을 흘렸지만 사랑에는 공감이 되지 않았다.
성경책을 읽다가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라는 말씀을 읽다가 두더지의 대답이 떠올랐다. 주님도 사랑을 제일이라 하시네. 왜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오 오직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3장 20절 말씀을 읽는데 무릎을 쳤다.
"아,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구나. 주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셨지 않은가? 그래서 성공은 사랑이라 하는 거구나. 조건 없는 사랑, 온전히 내어주는 사랑, 주와 닮은 사랑을 그래서 성공이라 하는 거구나."
사랑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비록 사람에게서 충분한 사랑을 느끼지 못했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자신을 고통 속에 온전히 내어놓으신 거였구나. 주께서 그토록 인간을 그리고 나를 사랑하신 거구나.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내가 살고 있는 거구나. 감사했다. 그리고 왜 소년이 "넌 성공이 뭐라고 생각하니?"라고 물었을 때 두더지가 "사랑하는 것."이라고 답했는지 알게 되었다.
알게 되었다. 결론을...
나도 사랑을 흠뻑 받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사랑을 충분히 느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나도 사랑을 흠뻑 나누어 주어야겠다는 다짐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