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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근한 수록 Mar 23. 2022

냉장고 속 샐러드

샐러드는 나를 보며 울부짖고 있었다.






아차.


퇴근할 때 냉장고에서 꺼내서 나가려고 다짐했던 샐러드의 존재를 떠올린 건 자전거로 신나게 달리던 중이었다. 되돌아가기엔 지금까지 달려온 길이 한참이었고, 그렇다고 샐러드를 두고 오자니 저녁이 아쉬웠다. 갈팡질팡 하는 새에 신호는 빨간 불. 한 발을 땅에 내려두고는 유턴이냐 직진이냐를 수십 번은 망설였다. 으이그 칠칠이. 들고 나오는 걸 왜 까먹어서는. 부질없는 질책도 한 움큼 담아냈다. 


정하지 못한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녹색 불은 보란 듯이 반짝였다. 돌아갔다가 다시 온다면 아마 20분은 족히 걸릴터였다. 지금은 퇴근시간이고, 20층짜리 건물에 놓인 엘리베이터는 쏟아지는 직장인들을 싣기 위해 층마다 자신의 가슴을 활짝 여닫기를 반복할 테니. 나는 페달을 밟아 가던 길을 마저 가기로 했다. 저녁 운동 시작까지는 앞으로 15분 후. 다음 일정에 늦을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샐러드를 포기했다. 아쉬운 마음은 내가 달리는 길을 따라 이어졌다. 



페달을 밟을수록 차가운 공기는 나를 때렸다. 샐러드가 보내는 원망이 실린 바람 같았다. 

- 왜 나를 두고 간 거야. 시들시들해지는 내 꼴을 좀 봐.

- 어쩔 수 없었어. 늦을 순 없잖아. 잊지 않고 챙기려고 했다고.


속으로 삼켜낸 변명이 참 우습게 들렸다. 정말 어쩔 수 없었던 건지 의문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어쩔 수 있었던 일이다. 충분히 어쩔 수 있던 일이다. 


퇴근 10분 전으로 돌아가 볼까. 

나는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며 어질러진 책상을 정리하고 있었다. 다가온 퇴근시간에 콧노래도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여유롭게 내 공간을 다듬던 그때 냉장고에 넣어둔 샐러드가 퍼뜩 떠올랐다. 시계를 힐끗 보니 5시 53분. 아직 여유 있네. 여기만 치우고 쓰레기를 버린 다음 냉장고로 가서 샐러드를 들고 오자. 그리고 퇴근하면 완벽하겠어.

나는 내 기억력을 맹신했다. 그리고 당연히 생각해 낼 줄 알았던 냉장고 속 샐러드는 10분도 안 되어 기억 저 편으로 사라졌다.






맞부닥치는 바람을 맞으며 내가 잊은 게 과연 샐러드뿐인지 생각했다. 페달을 밟을 때마다 스쳐 지나가는 거리의 장면들이 너울거리며 춤을 췄고, 두 다리는 바닥을 향해 힘차게 뻗었다. 순식간에 바뀌는 장면 뒤편에는 결심했지만 지켜지지 못한 오늘의 다짐들이 있었다. 


생일 케이크 예약은 오늘 꼭 하자.
양말은 출근 전에 빨래통에 넣어 놓고 나가야지.
찍어둔 오늘 아침 사진은 지하철 안에서 정리하는 거야.
운동 예약은 늦어도 3시엔 해 둘 것.


다짐들은 내 하루에 고스란히 놓여 있었지만, 나는 그것들을 다시 떠올리지 못했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이봐, 설마 잊은 거야?' 하며 등골이 오싹해지는 경험을 몇 차례 했을 뿐이다.


남겨 둔 다짐들의 뒤늦은 도발에 '아차. 하려고 했는데.' 따위의 말로 응수하던 나. 기억날 거면 늦기 전에 나면 얼마나 좋아. 헬스장 근처에 자전거를 세운 뒤 서둘러 걷기 시작했다. 자박자박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놓친 다짐들이 발끝에 채였다. 내 주변에 어지럽게 널브러진 다짐들을 한데 모았다. 그러자 슬며시 공통분모가 보였다. 

1. 비교적 간단한 일일 것. 2. 당장 할 수 있지만 미룰 것. 미래를 담보로 걸어둔 다짐은 쉽게 잊혔다. 1분이면 끝날 일인데, 다음으로 미룬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됐다.


끝내 버리지 못한 나쁜 습관이 오늘 내 저녁을 결정했다. 바꾸지 않으면 아마 앞으로도 그럴 거다. 떠올랐을 때 바로 행하는 자세.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그 습관을 나는 오늘 버리기로 결심했다. 냉장고 속에서 울부짖는 샐러드는 이제 더 이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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