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 쓰는 편지
딸아, 가끔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지.
“내가 지금 하는 일이 정말 맞는 걸까?”
하지 않아도 될 것 같고, 해도 별 의미가 없는 것 같다는 생각.
이럴때 엄마는 클로드 비알라(Claude Viallat)라는 할아버지 작가가 70년이라는 세월 동안 매일 같은 패턴을 반복해서 그리고 있다는걸 떠올리곤 해.
비알라는 그날의 기분에 따라 고른 천을 바닥에 펼치고,
전날 작업한 작품을 옆에 두고 작업을 이어가면
하루가 끝날 무렵 두세 점의 작품이 남는다고 해.
이를 “일을 한다기보다 무언가를 그저 하는 것”이라고 표현했어.
이 할아버지 화가의 작업은 반복이라는 단순한 원리에 기초해.
특별한 도구나 자원도, 거창한 계획도 필요 없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추상회화가 막다른 벽에 부딪혔다고 느꼈던 그에게,
이 단순한 방식은 새로운 작업의 가능성을 열어주었어.
미리 무엇을 계획하거나 결정짓지 않기에
작업에는 실수도 실패도 없고, 그저 주어진 것을 받아들여.
비알라는 이것을 “대범하고 이상적인 태도”라고 말했어.
형식이 반복되면 곧 한계에 부딪힐 것 같지만,
오히려 결과는 무한한 다양성으로 펼쳐져.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과 ‘마주하려는’ 태도에서 나온 결과물이야.
딸아, 오늘도 새로운 것과 마주하러 가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