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타이틀
볼리비아 따리하에서 첫 휴일을 맞았다. 휴일이리고 해봤자 사는 곳이 변한거지 사람이 변한 거 아니라서 여전한 나의 휴일이다. 본래 살던 한국의 파주와 비교해도 그 조용함과 한적함이 비슷한지라 정말 여전한 휴일.
장을 보러 갔다. 수염도 깎지 않고 쓰레빠를 질질 끌고, 이어폰은 헐렁하다 싶은 정도로만 귀에 걸친 채로 장을 보러 갔다. 고아먹겠다며 소꼬리를 좀 사고, 김장거리도 좀 사고, 과일도 좀 사고, 어슬렁어슬렁. 오른손에는 짐이 한가득, 왼손에는 케이크 한 조각을 들고 먹으면서.
뭐 재미있는 거 없나 이리저리 돌았다. 볼리비아 사람들에게는 시장 한복판에서 부스스한 머리, 깎지 않은 수염, 질질 끄는 쓰레빠, 심지어 길거리에서 테이크아웃으로 조각케잌을 먹어대는 외국인이 재미거리겠지만, 어쨌거나 내게는 딱히 재미있는 게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시장 저쪽 구석 벤치에서 커플하나를 발견했다. 남자는 여자에게 기타를 쳐주며 속삭이고 있었다.(비유 같은 게 아니라, 정말 기타소리도 노랫소리도 둘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았다.) 여자는 그 작은 소리가 새나가지 않게 가만히 고개를 숙인 채 듣고 있었다.
옆에서 보니까 괜히 예뻤다. 방해가 될까 그냥 지나쳤다가, '에라 모르겠다.' 그들 앞으로 갔다. 그리고 "정말 예뻐서 그런데 사진하나만 찍어도 되요?" 라며 그들에게 물었다. 그들은 흔쾌히 좋다며 포즈까지 취해주더라.
주책이다. 한국에서 하던 짓이 어디 안 가는지, 아무에게나 아무생각 없이 말거는 건 여전하네. 스페인어를 못하면 좀 안 그럴 줄 알았는데, 수다스러운 건 불치병인 듯. 더욱이나 뭐가 좋다고 사이좋은 연인들 보면 지가 흐뭇해하는 건지.
생각해보면 나는 예전부터 로맨틱 코미디가 좋았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해피엔딩이라 좋았는지, 아니면 동경이었는지, 뭐였는지. 혈기 왕성할 때 저지른 이벤트만 손에 꼽아도 손이 오그라들어 다 셀 수가 없다.
그렇다보니 필연적으로 로맨틱 명가라는 워킹타이틀의 영화를 사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을 시작으로 "어바웃 타임"까지(물론 그 이후로도 좋은 영화들은 많았다. 각본가가 이래저래 바뀌다보니 다 좋을 수는 없었지만) 영화들을 다 찾아보면서 짝사랑을 한 거다.
그런데 영화를 쭈욱 보다보면 재미있는 공통점이 보인다. 하나같이 찌질한 남자들로 가득하다. 휴 그랜트가 그랬고, 폴 베타니가 그랬고 도널 그리슨도 그랬다.(심지어 콜린퍼스마저 그랬으니 이정도면 작정한 거리고 봐야지.) 그리고 그 찌질한 녀석들은 점차 괜찮은 녀석들이 되어간다. 사랑하는 것으로, 오로지 사랑에 매달리는, 찌질하게 사랑에 매달리는 것으로 괜찮은 녀석들이 되어가는 것이다.(그래서였나, 남일 같지 않아서 그토록 그들을 응원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 속에서 휴 그랜트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왜 항상 남의 결혼식만 가고, 나의 결혼식은 안하는 걸까?" 친구가 대답한다. "아마 네가 변변치 못해서 일 거야." 그 장면에서 괜히 내 속이 뜨끔. 아직도 좀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 걸 저도 아는 거지.
여자들 마음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사랑을 하는 여자들이야 예뻐진다더라. 근데 사랑을 하는 남자들은 뭐든 해내는 녀석들로 변한다. 그게 변변치 못한 녀석들이 변변한 녀석들로 되어가는 이유다. 그렇게 되어 결국 영원한 사랑을 약속할 만큼 담이 커지는 거지.(약속을 지키고 못 지키고는 또 다른 이야기니까 나중에 하자.) 사랑이 얼마나 굉장한 건지 말하고 싶었다.
…….
"내가 다른 연인들 보며 흐뭇해하는 것은 변태라서가 아니다."라는 변명을 참 장황하게도 썼다.
앞에 말들은 짚어치우더라도, 사람은 예쁜 것을 보면 좋기 마련이다. 이 정도면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 사랑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많아져야하는 이유 말이다.
추신, 사랑을 하자. 그 찌질함이 다 드러나기까지 열렬히.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내가 되기까지 열렬히. 남녀 나눠서 싸우지들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