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예전에, 그러니까 내가 연애에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들던 시절, 아는 형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형, 결혼하면 뭐가 좋아요?” 그때 형은 이렇게 말했다. “사실, 몰라. 근데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어. 근데 이 사람은 정말 놓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잡았어.” 그 당시에는 그게 무슨 소리인가 했다. “잡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라는 건 대체 뭐고, 그렇지 않은 건 뭔지 몰랐으니까. 아무튼 간에 그렇게 모른 채로 한동안을 지냈다.
그러다가 대학을 졸업하고, 내 손으로 조금이지만 돈을 벌기 시작하며 한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언제나 그렇듯 내 눈에는 세상에서 제일 예뻤고,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잡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은 알 수가 없었다. 뭐, 그래도 심각할 것은 없었다. 사랑을 했고, 즐거웠고 언제나 기뻤다. 가끔 다툴 때도 있었지만 그 조차도 지금생각해보면 기쁜 일이었다.
그런데 한번은 하는 일이 점점 과중해지더니 어찌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적이 있었다. 새벽에 출근해서 자정이 넘도록 일해야 하는 나날, 휴일조차 일을 해야 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누가 과로사를 했다고 하면 코웃음을 쳤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왜 일을 하다가 죽냐.’ 하며 남 일처럼 굴었는데, 그때는 이해가 갔다. 이러다가는 정말 죽겠구나 싶었다.
너무 힘들었다. 그러다 결국 자정이 넘은 시각, 사무실을 빠져나와 여자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 “여보세요?”
그녀 : “응? 이 야심한 밤에 무슨 일이신가요? 김종빈씨.”
나 : “아, 자고 있었지. 미안.”
그녀 : “아니요. 그렇지는 않았습니다만, 김종빈씨께서 요즘 바쁘다고 전화통화도 어렵다 하지 않으셨나요?”
나 : “아니, 그냥 목소리 듣고 싶어서, 화났구나.”
그녀 : “아니요, 그럴 리가요. 나라를 지키시는데, 여자친구를 못 지키는 정도야 어쩔 수 없지요. 김종빈씨께서 나라를 지켜주시는 덕분에 제가 이렇게 잘 지냅니다.”
나 : “미안하다.”
그녀 : “힘들어? 오늘 뭐, 안 좋은 일 있었어?”
나 : “나, 군인 그만할까? 군인 그만하고 싶어서, 그리고 한동안은 좀 쉬고 싶어서.”
그녀 : “음......, 그래. 군인 그만하자. 그리고 좀 쉬어. 내가 2년 정도는 먹여 살릴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좀 쉬자.”
그때 알았다. “잡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을 말이다. 나는 구시대적인 사람이라 집에서 아내가 벌어오는 돈으로 2년씩이나 편히 지낼 자신은 없었지만, 그 말이 기뻤다. 이 사람이라면 내가 지금보다 더 모지리가 되어도 나를 보아주겠구나. 물론 그 뒤로 열심히 나라를 지킨답시고 그 친구는 결국 못 지켰지만 문득 생각이 났다.
한번쯤은 사랑만 먹으며 살아보고 싶었다. 비록 작은 집이라도 아늑하도록, 설령 부족한 찬이라고 따듯한 밥을 먹으며 살아보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평수 넓은 집에서 살아보겠다고, 밥상에 찬 하나 더 올려보겠다고 컥컥거리며 살아놓고, 정작 놓치고 나니 이러는 게 우습다.
어땠을까. 아니다, 이미 지나버린 걸 가지고, 괜한 생각이다.
하지만 요즘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한번쯤은 사랑만 먹으며 살아보고 싶다고, 그냥 가끔 그런 생각을 했다.
추신, 참 이기적인 거 아는데, 그래도 말이야. 내가 지금보다 더 모지리가 되어도 나를 내팽개쳐버리지 않는 사람을 만다고 싶었어. 다시금 내가 털어내고 일어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