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류 없는 아이의 고열, 이름 없는 서류, 그리고 빚이 되어 돌아온 밤
지안이 잠든 새벽 세 시,
마이라는 아이의 몸에서 이상한 열기를 느꼈다.
뺨이 활활 달아올라 있었다.
체온계를 겨우 찾아 겨드랑이에 끼우자 숫자는 39.2를 가리켰다.
루시아가 허둥지둥 서랍을 뒤져 해열제 통을 꺼냈다.
뚜껑을 열자 알약은 하나도 없었다.
“유통기한도 지난 빈 통이야…”
껍데기만 달그락댔다.
창문 밖 빗줄기는 더 굵어지고,
방 안 공기는 눅눅하게 들러붙었다.
마이라는 얼음주머니 대신 찬 수건을 적셔 이마에 올려주었으나
지안의 숨은 더 가빠졌다.
“더 기다리면 위험해.”
두 사람은 눈빛만으로 합의했다.
우산 두 개, 담요 한 장.
새벽 네 시, 빗속으로 달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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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의 복도
도착한 응급실은 비상등 아래 붉게 웅성거렸다.
의식 잃은 노인이 들것에 실려 들어가고,
팔에 피를 흘리는 남자가 접수대를 향해 “살려달라!”고 소리쳤다.
젊은 간호사는 사람들을 밀어내며 통로를 확보했다.
마이라는 지안을 품에 꽉 안고
순번표를 뽑았다. A-273.
모니터엔 B-041, C-118 같은 숫자가 느리게 넘어가고 있었다.
지안의 울음은 힘이 빠져가는 듯 끊어졌다 이어졌다.
몸이 축축 늘어졌다.
마이라의 손끝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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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구 앞의 질문
“다음 분, A-273.”
접수 창구 유리를 사이에 두고 직원이 말했다.
“환자 이름요?”
“지안…입니다.”
“성은요?”
직원의 시선이 차갑게 그 다음을 요구했다.
순간 공기가 멎었다.
루시아가 겨우 입을 뗐다.
“그냥… 지안이에요.”
직원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주민번호는?”
“아직… 없어요.”
“그럼 여권이라도—”
“없습니다.”
대기 줄 뒤에서 조바심 섞인 기침 소리,
주변 시선이 두 사람에게로 꽂혔다.
직원이 한숨을 내쉬며 인턴에게 손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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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없는 아이”와 급한 환자들
남색 스크럽 차림 인턴이 접수대를 넘겨다보았다.
“비식별 외국인 코드로 넣죠. 아이 상태 심각해 보여요.”
그 순간 들것에 실린 교통사고 환자가 피투성이로 밀려 들어오면서
복도는 다시 비명과 피냄새로 가득 찼다.
간호사가 고열 아기와 들것 사이를 막아섰다.
“아이 데리고 계단 쪽으로 비켜 주세요!”
마이라는 담요로 지안의 얼굴을 덮었다.
피 냄새와 빗비린내, 불안이 뒤섞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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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치실 뒤편
인턴은 재빨리 열을 재고 링거를 꽂았다.
지안이 바늘이 들어가자 잠깐 울음을 터뜨렸지만 힘이 없어 곧 떨렸다.
“고열경련 직전입니다. 해열제 IV 먼저—”
곧 체온이 38도로 내려오자 인턴이 작은 웃음을 지었다.
“다행히 큰 합병증은 없어요.”
그가 차트를 쓰며 물었다.
“아이 국적과 성은 공란으로 둘까요?”
마이라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성 없는 아이’라는 칸이 공백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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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 창구 앞의 숫자
새벽 다섯 시 반.
지안은 해열제에 잠이 들었고,
두 사람은 계산 창구 앞에 서 있었다.
“총액 190,000원입니다.
의료보험이 안 되셔서 전액 본인 부담이에요.”
직원의 말은 담담했다.
루시아가 지갑을 열었다.
손안 현금은 70,000원뿐.
체류 자격이 없어 카드도 없었다.
“혹시… 분할 납부는 안 될까요?”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외국인 비보험 환자는 당일 일부라도 납부하셔야 해요.”
뒤에서 다른 보호자가 “빨리 좀요!” 하고 짜증 섞인 목소리를 냈다.
복도 공기가 더 쪼그라들었다.
인턴이 다시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7만 원만 예치금으로 걸고,
주간에 재무팀하고 상의하세요. 제가 메모 남겨둘게요.”
직원이 못마땅한 얼굴로 현금영수증 용지를 꺼냈다.
70,000원을 건네는 루시아 손끝이 젖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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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오는 길
새벽 여섯 시가 다 돼서야 두 사람은 지안을 담요에 싸 끌어안았다.
빗줄기는 잦아들었지만 도로 위엔 물이 고여 있었다.
편의점 간판 불빛 아래에서 마이라는 담요를 한 번 더 여며주었다.
“다음엔… 어떻게 하지?”
루시아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모르겠어. 그래도 오늘은 살았어.”
마이라는 담담히 말했다.
“병원비부터 다시 벌어야지.”
동이 터오자 회색 구름 사이에 희미한 푸른빛이 번졌다.
반지하 창문 너머 벽지는 더 눅눅해졌을 테지만,
그곳만이 오늘 밤 세 사람이 잠들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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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사의 전화
해가 완전히 뜨기 전, 고선영 사회복지사의 전화가 울렸다.
“새벽 진료 기록 확인했어요. 아이 괜찮나요?”
루시아는 지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열이 내려갔어요. 그런데 병원비가…”
고선영은 잠시 숨을 고르고, 낮게 말했다.
“출생신고가 해결되지 않으면 의료비 지원도 받을 수 없어요.
방법을 다시 찾아봐야 해요. 포기하지 말고요.”
전화를 끊은 뒤
두 사람은 잠든 지안을 사이에 두고 침묵했다.
“벽은 자꾸 높아져.”
루시아가 속삭였다.
“넘을 방법도 언젠가 보이겠지.”
마이라는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지안의 미지근한 체온이 두 사람의 손끝을 덮었다.
적어도 오늘 밤,
서류 없는 아이의 이름은
두 사람 가슴 속에 뜨겁게 기록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