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이름 없는 출석

일을 떠나야 하는 두 엄마, 서류 없는 아이의 첫 교실

by 지구 외계인


반지하방 한가운데서 블록을 쌓던 지안이 꾸르륵 넘어뜨리자,

마이라는 허리를 펴며 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4시 10분.

한 시간 뒤엔 비닐하우스에 들어가야 한다.

오늘은 토마토 새벽 수확 직날(直日)이라 5시까지 출근하지 못하면

품삯 일당 7만 원은 바로 다른 손으로 넘어간다.


침대 대신 깔린 요 가장자리엔

루시아의 작업복과 면장갑이 깔끔하게 접혀있었다.

루시아는 오후 2시쯤 다시 하우스로 들어가

전동 진동기를 꽃술에 대며 인공수분(受粉) 작업을 해야 한다.

꽃가루가 가장 잘 터지는 한낮 온도와 습도에 맞춰야 해서

시간을 바꾸기 어렵다.


“새벽 반나절은 나,

오후는 너. 그러면 지안을 혼자 둘 시간이 여섯 시간이나 비어.”

루시아가 물끄러미 달력을 보며 중얼거렸다.

마이라는 잠든 지안을 이불로 감싸며 말했다.

“얼굴만 들이밀고 집에 다시 오면 새벽잠이 30분도 안 돼.”


그때 반지하 계단 틈으로 우편물이 한 장 미끄러져 들어왔다.

노란 안내문 위에 굵은 글씨로 쓰인 문구—

『맞벌이 가정 우선, 어린이집·유치원 입소 설명회』

루시아가 안내문을 들어 보이며 속삭였다.

“우리도 맞벌이잖아. 넣어만 볼까?”

“번호가 없는데… 그래도 시도해 봐야 해.”

마이라는 종이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주민센터의 창구


평일 오전, 두 사람은 지안 손을 잡고 주민센터에 섰다.

접수 담당자는 밝은 목소리로 시작했지만,

컴퓨터 화면을 본 뒤엔 실소를 삼켰다.


“아이 주민등록번호가 없으면 대기번호 자체를 넣을 수 없어요.”

“저희는… 출생신고가 안 돼서요.”

“번호가 없으면 홈페이지에서도, 오프라인에서도 접수가 불가합니다.”

짧은 문장이었다.

창구 유리 너머 공기가 식었다.


그날 밤, 사회복지사 고선영에게 전화가 왔다.

“공식 어린이집은 힘들 거예요.

대신 ‘비등록 아동 학습 센터’ 자리 하나가 비었어요—주 2회, 세 시간씩.”

마이라는 손에 쥔 볼펜을 굳게 잡았다.

“그 시간이라도 맡길 수 있으면 꼭 부탁드릴게요.”


첫 등원


수요일 아침,

중고로 산 작은 가방에 물병, 바나나 한 개, 체온계를 챙겼다.

지안은 새로 배운 두 발걸음으로 현관까지 걸어와 손을 내밀었다.


성당 지하를 개조한 학습센터는

벽마다 기증받은 장난감이 높이 쌓여 있었고

솜 냄새와 크레파스 냄새가 섞여 있었다.


봉사 선생님이 다가와 부드럽게 물었다.

“이름이… 지안이죠? 성은요?”

마이라와 루시아가 눈을 맞췄다.

“…그냥 지안입니다.”

선생님은 잠시 멈칫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표엔 두 글자만 적어둘게요.”


흰 스티커에 ‘지안’ 두 글자가 적히는 동안

마이라는 가슴이 저릿했다.

서류엔 없지만, 누군가가 처음으로 적어준 지안의 이름이었다.


지안은 주황색 크레용을 움켜쥐고

초록 도화지에 삐뚤빼뚤 선을 그었다.

두 엄마는 그 선이 세상으로 향한 첫 낙서 같아 오래 바라보았다.


한낮의 비닐하우스


루시아는 센터 수업이 끝나는 세 시 전에

비닐하우스 마지막 줄 인공수분 작업을 끝냈다.

진동기 끝이 꽃밥을 흔들 때마다

노란 꽃가루가 햇빛 속에 가늘게 흩어졌다.

험한 일에 비해 임금은 낮지만,

세금도 서류도 묻지 않는다는 이유로

두 엄마에게는 놓칠 수 없는 일자리였다.


저녁, 반지하방


지안은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잠이 들었다.

창밖 비닐하우스들이 해질녘 붉은빛에 물들며 멀어졌다.

마이라는 창가에 머리를 기대며 중얼거렸다.

“우린 여전히 서류도 없고, 내일 새벽 4시에 또 나가야 하지만…

오늘 지안 이름표를 받았어.”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가 ‘지안’이라고 불러 줬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뻤어.”


밤, 반지하방 벽지엔 습기가 더 번졌지만

냉장고 자석엔 작은 스티커 하나가 붙어 있었다.

성 없이 적힌 두 글자—지안.

두 엄마는 그 글자를 바라보며

조용히 한 음절씩 불렀다.


“지—안.”


방 안엔 습기와 흙냄새,

그리고 작은 숨소리가 포근하게 섞였다.

숫자로 기록되지 못한 이름이었지만,

오늘 밤도 세 사람을 단단히 묶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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