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길이 없는 곳에 바람부터 걷는다

by 지구 외계인


새벽 넷 시, 해풍이 비닐하우스 천장을 얇게 때렸다.

마이라는 트럭 시동을 켜며 잠깐 창문을 내렸다.

차가운 공기가 한 움큼 들어와 눈꺼풀까지 맑혔다.

라디오에선 국회 속기록 중계가 조용히 흘렀다.


“…미등록 아동 임시주민번호 발급,

초‧중등교육법 일부 개정안…”


문장 하나가 바람에 실려 팔뚝에 닿는 듯했다.

마이라는 볼륨을 조금 높였다가,

다시 줄였다.

소식은 낯설 만큼 커졌고,

행동은 여전히 소박해야 했다.


트럭 뒷좌석에는 흰 봉투 상자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집 수리 예산’이라고 적은 메모가

파도 소리 같은 엔진 진동에 흔들렸지만

테이프 모서리는 꿋꿋이 붙어 있었다.


읍내 학교 방과후 시간이 시작되자

김 선생이 노트북 뚜껑을 열었다.

화상 독서회 화면에 ‘미성년 보호센터 2-05’가 접속했다.

웹캠 속 지안은 흰 벽 앞 책상에 앉아 있었다.

창문 대신 환기용 작은 틈이 달린 방,

그러나 아이의 눈은 바람을 기억하듯 맑았다.


“오늘은 시를 읽어 볼 거야.”

김 선생이 화면을 향해 책을 들어 올렸다.

지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별이 구름에 가려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엄마의 편지에서 배웠다.”


스페인어 번역이 아이디 ‘L. Diaz’로 겹쳐 채팅창에 올라왔다.

필리핀 격리시설에서 날아온 루시아의 문장이었다.

학생 준하는 별 이모티콘을 스팸처럼 연속으로 보내고,

수녀는 스피커를 가까이 대며

“별은 구름도 길러 준다”고 속삭였다.


화면 속 지안은 쑥스러운 듯 어깨를 좁혔지만

웃음은 숨기지 못했다.

출석부엔 없는 반이지만,

교무실 구석과 보호센터 책상이

하나의 교실이 되었다.


수요일 면회 날,

마이라는 유리벽 너머 지안을 불렀다.

장미 한 잎을 넣은 노트를 받아 드니

잎맥에 잉크 자국이 엷게 번져 있었다.


“바람이 집을 기억한다면

꽃잎은 바람을 기억할 거야.”


마이라는 노트를 조심스레 덮었다.

“꽃잎이 바람을 닮으려면

창문부터 열어야겠지.”

유리를 통해 전한 입모양이었다.

지안은 손바닥을 유리에 대고

가장 넓은 미소를 그렸다.



성당 앞마당엔

퇴근길 주민들과 학생들이 조용히 모여들었다.

촛불 대신 휴대폰 플래시가 켜졌고,

수녀는 음향 장비 대신 스피커폰을 들고 섰다.

김 선생이 전송한 녹음 파일이 재생되었다.


지안의 글 <바람이 집을 다시 찾을 때까지>

첫 문단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오자

플래시 불빛들이 수면처럼 일렁였다.


“하나, 둘… 스물일곱.”

보호센터 2층 창문에 선 지안이,

출석번호를 세듯 빛을 세고 있었다.

스물여덟 번째 불빛은

수녀가 가슴께에 둔 작은 LED 촛불,

스물아홉 번째는

마이라가 트럭 조수석에서 비춘 헤드라이트.



밤이 깊은 뒤에도

SNS 피드는 ‘#지안특례법’ 해시태그로 들떠 있었다.

누군가는 “법이 아이를 지키자”라 썼고,

누군가는 “불법을 용인 말라”라 썼다.

하지만 지안의 글 전문을 리트윗하는 손가락이

훨씬 더 빠르고 많았다.


컨테이너로 돌아온 마이라는

해풍 금고 자물쇠를 열고

새 봉투 한 장을 넣었다.

장 씨는 헌 트럭 열쇠 대신

중고 페인트 통을 건네며 말했다.

“빈집 창틀부터 하얗게 칠해 두자고.”


루시아의 편지는

비행기 표와 함께 부산 공항 도착장을 기다리고 있다.

다만 ‘귀국 허가’라는 낯선 스탬프가

무사히 찍힐 때까진 시간이 더 필요하다.


하지만 지안은 안다.

길이 없다면

바람이 먼저 걷는다는 것을.

그리고 걸어 들어온 바람은

어디에도 적히지 않은 이름을

다시 초대할 거라는 것을.


창문 없는 임시 방 안에서도

별빛은 틈을 찾아 들어왔다.

지안은 노트를 펼쳐

새 문장을 적기 시작했다.


“창문이 없는 방이라도

별은 찾아 들어온다.

그때, 이름보다 먼저 반짝이는 것은

웃음이다.”


웃음을 삼킨 숨이

글자마다 고르게 묻어났다.

바람은 이미,

다음 길을 준비하며

창문 없는 벽을 살짝 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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