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정에 매화가 막 터질 듯 봉오리를 세우던 아침,
남해고 졸업식 현수막이 해풍에 바스락댔다.
4-3 교실 창가 칠판엔 ‘졸업생 27번 지안’ 이름표가 여전히 두 글자였지만
그 아래엔 파란 잉크로 새 번호가 적혀 있었다.
**“09 0301-406***”**
“지안법”이 국무회의를 통과하자
출생신고가 없던 아이들에게 첫 고유번호가 배정되었다.
번호를 담은 임시 주민등록증이 학교 행정실 봉투에 도착한 날,
김 선생은 아무 말 없이 그 봉투를 칠판 중간에 붙였다.
“지안, 졸업장은 네 이름으로 두 장이야.
하나는 학교가,
하나는 나라가 적어 준 거니까.”
지안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검정 교복 단추가 바람에 살짝 흔들렸다.
번호를 떠올리는 대신,
새벽마다 적어 둔 별자리 노트를 떠올렸다.
‘숫자는 자리를 주지만,
별은 길을 준다’고 적어 둔 문장도 같이.
강당에서 축가가 끝나고
교장 선생이 졸업장을 나눠 주는 도중,
로비 쪽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출입국 직원 두 명이 대기한 채
서류봉투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서류 첫 장 맨 위엔 ‘마이라(불법체류 3846일)’이라는 활자가 선명했다.
마이라는 출구 쪽을 바라보다
도움닫기 없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지안은 단상 아래로 뛰어 내려가
엄마 손등을 두 손으로 감쌌다.
“나, 이제 번호도 있고 대학 갈 거야.
그러니까—다시 만날 때까지
숨 쉬는 거 잊지 마.”
마이라는 떨리는 숨을 짧게 삼키더니
아이 이마에 입을 맞췄다.
“네가 숨 쉬는 만큼
나는 돌아갈 이유가 생겨.”
직원들이 서류를 내밀었지만
마이라는 잠깐만, 하고 손짓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작은 소포를 꺼냈다.
낡은 스페인어 사전 사이에 끼워 둔
루시아의 사진, 지안이 그린 세 칸짜리 집 스케치,
해풍 금고 열쇠 하나.
“엄마 둘이 돌아올 집,
열쇠는 네가 보관하고 있어.”
지안은 덜컥 울 것 같은 눈으로 웃었다.
“문은 내가 달아 둘게.
바람 안 새게.”
출입국 밴이 학교 담을 돌아 나갈 때
운전석 너머로 바다가 번뜩였다.
마이라는 트럭에서 내려다 본 적 있던 그 반짝임을
차창에 손바닥을 대며 기억했다.
아득한 먼발치,
관광비자로 처음 본 한강 물빛보다
조금 더 깊고 짠 냄새.
한 달 뒤,
지안은 보호센터 숙소를 정리해
학교 앞 원룸으로 옮겼다.
장 씨가 트럭 한 번으로 짐을 실어 날라 주고
수녀는 창문 커튼을 달아 주었다.
컨테이너 시절부터 모은 봉투는
등록된 통장으로 옮겨졌고,
통장 이름 앞엔 드물게 성이 없는 예금주 표기가 찍혔다.
“주민번호 뒷자리가 별표라 신기하지?”
은행 직원이 농담하듯 말했지만
지안은 그냥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은 없지만—별은 번호보다 먼저 있었다.
겨울이 끝나가는 저녁,
지안은 성당 앞에서 휴대폰 카메라를 세웠다.
화면 속 지구 반대편 시차로 새벽을 맞는 루시아가
영상통화 화면에 나타났다.
“엄마—졸업장 보여?”
지안이 북극성처럼 삼각형 꼭짓점에 봉투를 들고 서자
루시아가 작은 박수 소리를 냈다.
갈라져도 닿는 거리였다.
종소리가 울리며
성당 유리창에 붉은 노을이 번졌다.
지안은 화면을 향해 팔을 벌린 뒤
천천히 손을 내렸다.
휴대폰 스피커 너머로
바람 지나가는 소리가 비슷하게 겹쳐 들렸다.
밤, 원룸 창문을 열고 노트를 펼쳤다.
노트 첫 페이지엔
‘바람이 집을 다시 찾을 때까지—완’
이라는 제목 아래 점 하나를 찍어 두었다.
하지만 뒷장은 아직 새하얗다.
지안은 볼펜을 들어
마지막 문장을 적었다.
“집은 문이 아니라
돌아올 방향이다.
바람도, 별도,
언젠가 두 엄마의 발걸음도
같은 쪽으로 불어올 것이다.”
볼펜 끝이 찍히며
검은 점이 작게 번졌다.
창문 너머 새벽별 하나가
여전히 자리 바꾸지 않고 빛났다.
지안은 노트를 덮고
해풍 금고에서 꺼낸 열쇠를
작은 목걸이 줄에 끼웠다.
열쇠 꼬리에 달린 녹슨 십자 모양이
빛에 반짝였다.
언젠가, 문이 생기면
가장 먼저 끼워 볼 열쇠.
그러나 기다림이 길어져도
길은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
바람은 번호보다 자유롭고,
이름은 별보다 오래 불렸다.
그리고 집은—
누군가 돌아오려는 마음이
여전히 따뜻한 곳이라면
그곳이 곧,
기록된 자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