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 바람이 다시 문을 두드리던 날

by 지구 외계인


남해의 겨울이 유난히 짧아졌다는 소식이 들리던 해,

봄빛은 토마토 비닐 옆을 훑고 바다까지 한 번에 번져 갔다.

지안은 여전히 같은 원룸 창문을 열어 두고,

새벽마다 별자리를 확인한다.

허기 대신 길을 알려 주던 별들에겐

이제 한글 이름이 붙었다.

‘이루다’, ‘머무르다’, ‘기록하다’ 같은 단어들.

별빛이 지우개라면,

그 단어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으리라 믿으며.



교육청 발행 주민등록증은 두 번째 갱신을 맞았다.

뒷자리 별표는 여전히 남아 있지만

반납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도장은 붉고 선명하다.

“가능”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법이 먼저 말해 준 증표이니

지안은 유효기간이 연장될 때마다

조용히 손바닥으로 문지른다.

그러면 바람에 씻긴 듯 증표 표면이 한결 맑아진다.


마이라가 떠난 뒤

해풍 금고를 대신해 책장 맨 위에 쌓이기 시작한 것은

신문 스크랩, 초청장, 항공권 사본이다.

‘출생등록특례 2차 개정 통과’ 기사 아래에는

필리핀 행정센터 도장이 찍힌

루시아의 가(假) 비자 사본이 눌려 있다.

‘가’라는 한글이 작다.

그러나 지안은 그 글자에 방금 싹이 튼 씨앗처럼

묘한 힘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마이라는 여전히 제3국 임시 체류 신분으로

부산행 비행기 표를 구하려 애쓰지만

메일은 종종 되돌아온다.

그래도 계절마다 한 번씩 도착하는 국제우편은

매번 두꺼워진다.

지안의 새 글,

옛 그림,

금고 열쇠를 문지르다 묻은 녹빛 반점이

편지 구석에 찍혀 돌아오고는 한다.



성당 앞마당에는

외국인 부모·학생 연합 작은 도서관이 들어섰다.

김 선생은 주말마다 남해행 버스를 타고 와

아이들의 글을 소리 내어 읽어 준다.

수녀는 여전히 흰 장미를 건네며,

“바람을 기억하는 꽃”이라는 애칭을 붙인다.

그 벽면 제일 높은 곳에는

지안이 열여섯에 그린 세 칸짜리 집 스케치가

바람에 아직 흔들리지 않은 채 걸려 있다.

누군가는 그것을 보고 묻는다.

“왜 창문이 두 개뿐인가요?”

지안은 대답 대신 미소로 넘어간다.

마지막 창문의 자리만이

여전히 비어 있다는 것을,

오랜 바람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저녁,

휴대폰 화면 저편에서

루시아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잠정 승인’이라는 도장이 찍혔어.

다음엔 ‘최종 승인’이겠지.”

지안은 엄지를 들어 보이며

아직 기록되지 않은 시간들을 마음속에 예약한다.

그리고 삼킨 숨을 내쉬듯 독백한다.

“바람이 길을 걸어줄 동안

나는 문을 지킬게.”



밤이면 하우스 지붕 너머

별들이 다시금 방향을 틀어 주곤 한다.

컨테이너는 사라졌고

흰 집은 아직 낡았지만

창문 두 개 사이엔 커튼 대신 바람이 산다.

그리고 문틀 위,

녹슨 작은 열쇠구멍 하나가

어디선가 돌아올 걸음들을 조용히 기억한다.


세월이 이름을 흔들어도,

이름이 길을 흔들어 주는 순간이 있으리라—

지안은 창문을 닫기 전

그 믿음을 낮게 중얼거린다.

그러면 바람은

늘 그렇듯 작게 대답한다.


“기록되지 않은 아이여,

이제는 바람보다 먼저 불리는 이름으로 남으라.”


그 대답이 창틀에 닿을 때

어둠 저편,

세 사람 숨결이 다시 겹쳐질 날의 소리가

가장 먼 별빛의 속도로

조금씩, 그러나 확실히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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