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주체적이고 평온하길

by 길 위에서

요즘 모임에서 빠지지 않는 대화가 있다. 부모님 돌봄에 대한 이야기다. 내 지인 중에는 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동생들과 한 동네에 모여 살기로 한 분이 있다. 아흔이 넘은 아버지는 집에 상주하는 요양보호사의 돌봄을 받으시고 의사인 남동생과 온 가족이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있으니 겉으로 보이는 조건이 나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과정은 쉽지 않다. 지인은 아버지의 섬망이 다시 심해지고 있어 무섭다고 했다. 부모님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또한 나 자신의 죽음을 맞이할 준비는 어떻게 할 것인가? 둘 다 큰 숙제다.


죽음의 주체성에 관한 내용이 나오는 동영상을 봤다. 흥미로웠다. 강연에서 강성용 서울대 남아시아센터장은 인도 전통에서 좋은 죽음이란 자기가 주체적으로 결정한 형태의 죽음이며, 자이나교에는 ‘살레카나’라는 종교적 존엄사가 있다고 말했다. 삶의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스스로 선택하여 음식을 줄이고 죽음을 맞이하는데, 성직자가 매일 방문해 의례도 행하고 주변 사람들이 찾아와 마지막 인사도 나눈다. 주체적으로 삶을 정리하는 모습은 주로 병원에서 죽음을 맞는 우리의 현실과 매우 대조되었다.


유튜브 동영상 중 한 장면을 갈무리한 것이다.


아버지는 병원을 극도로 싫어하셨지만 마지막 60일 동안 병원에 계시다가 중환자실에서 돌아가셨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보다 한 달 앞서 응급실을 거쳐 입원했을 때, 아버지는 장 내시경을 거부하셨고 그대로 죽는 편을 택하겠다고 단호히 말씀하셨다. 보호자인 나는 결국 치료 거부 상황을 확인하는 서류에 서명을 할 수밖에 없었고, 아버지는 원하시는 대로 집으로 오셨다. 그리고 마지막을 예감하셨는지 가지고 계시던 물건들을 대부분 정리하셨다. 그때 연명의료에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밝히신 것이었다. 중환자실에 계실 때, 오후 면회 시간에 신부님을 모시고 병자성사를 받았다. 아버지의 종교를 따라 장례를 치르려고 성당에 문의했는데 마침 신부님께서 와 주시겠다고 하신 것이었다. 면회는 2명까지만 허락되어서 병자성사 자리에는 신자인 삼촌만 함께했다. 신부님이 떠나신 후 뵈었을 때, 아버지는 눈을 가늘게 뜨셨다.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였다. 마지막으로 주변을 둘러보셨던 걸까. 다음날 눈을 감으셨다. 11년 전의 일이다.


몇 해 전에 나도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했다. 치매를 않는 엄마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문의했다. 직접 의사결정이 힘든 경우, 자식 두 명 이상의 동의가 있어야 하고 자식이 한 명이면 의사 한 분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들었다. 엄마도 평소의 말씀으로 미루어 볼 때 연명의료에 반대하실 것이 분명했다. 두어 해 후, 엄마가 사레 사고로 입원했을 때 담당의사의 동의를 얻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등록할 수 있었다. 이런 절차는 시작 단계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매 순간 다시 결정이 필요하다는 현실 상황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엄마는 돌아가시기 9개월 전에 가장 큰 위기가 찾아왔다. 두 번째 코로나 감염 후 회복하던 중에 갑자기 상태가 나빠졌고 의식도 잃었다. 직전 두 해 동안 수술과 입원을 반복한 경과를 다 아시고 엄마의 상황을 잘 이해하시는 요양원 원장님과 상의하고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엄마를 대학병원 응급실로 모시지 않기로. 산소포화도가 떨어지고 있던 중이라 산소마스크만 씌워 드렸다. 다행히 엄마는 이틀 만에 의식을 찾으셨다.


이 위기를 거치면서 나는 요양원 원장과 숙의 끝에 가능하면 병원으로 모시지 않고 요양원에서 임종을 맞는 쪽으로 마음을 정했다. 당시는 코로나 때문에 면회도 불가능해서 엄마가 낯선 의료진에 둘러싸여 마지막 순간을 맞게 하고 싶지 않았다. 병원이 아닌 곳에서 사망하는 경우 어떤 절차를 거쳐야 하는지도 미리 알아 두었다. 마지막 순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으니 할 수 있는 만큼만 대비할 뿐이었다.


엄마는 마지막 일주일 동안 식사를 전혀 못하셨다. 사흘째 되던 날, 엄마의 호흡이 매우 고통스러워 보였다. 그 모습이 안타까워서 영양 주사를 놔 달라고 부탁했다. 연명의료에 절대 반대할 엄마의 의사를 알기에 계속 주사로 영양을 공급할 의도는 아니었다. 영양 주사 후 엄마의 호흡이 편안해졌다. 엄마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참으로 다행이었다. 여러 날 전혀 못 드신 상태인데 힘들어 보이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요양원 원장님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머님이 고통스럽지 않은 것은 큰 선물입니다.” 내가 평생 받은 선물 중 가장 큰 선물이었다. 엄마는 며칠에 걸쳐 자연 호흡이 점점 줄어들어 아주 편안히 눈을 감으신 것 같다고 나중에 검안 의사에게 들었다. 그 말씀이 크게 위안이 되었다. 옆에서 엄마의 마지막 모습을 본 원장과 요양보호사들은 엄마처럼 세상을 떠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나중에 내게 말씀하셨다. 나도 똑같은 마음이다.


살레카나에 대해 들으면서 엄마의 마지막 일주일을 기억했다. 천주교도인 엄마 옆에 신부님이 계시지 않았고 엄마가 말씀으로 “나 이제 단식하고 떠날 거야.” 하고 밝히지 않았지만 말이다. 나도 삶의 마지막을 맞이하게 될 때 엄마처럼 평온한 가운데 떠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기를. 작은 소망 하나를 품는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무언의 멘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