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다른 선택
2022년 12월, 엄마가 두 번째 코로나 확진을 받았다. 그해 2월, 첫 확진 때는 요양원의 어르신들이 각각 다른 곳으로 이송되었다. 엄마는 수도권을 가로질러 멀리 경기도의료원으로 가셨다가 무사히 돌아오셨지만, 다른 병원으로 가셨던 어르신 중에는 골절 사고가 난 분도 있었다. 이번에는 다른 곳으로 이송 없이 요양원 전체가 코호트 격리되었다. 어르신들은 대부분 독감보다 약한 감기증상만 있다고 했다. 격리 해제 후 엄마는 열이 조금씩 올랐다 내렸다 하지만 식사도 그럭저럭 하신다고 듣고 마음을 놓았다.
며칠 후 요양원에서 연락이 왔다. 갑자기 식사를 못하시는데 영양 공급에 문제가 생기면 욕창이 생길까 걱정이니 일시적으로 비위관(콧줄)을 넣어 식사를 하시게 하자고 했다. 엄마도 나도 연명치료는 원하지 않는다고 밝혔지만, 원장은 코로나 후유증을 극복할 후 있게 콧줄을 한시적으로만 이용해 보자고 나를 설득했다. 다음날부터 긴 설 연휴에 들어가니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기면 대처하기는 더욱 어려울 것이었다. 결국 나는 동의했다. 주사도 순식간에 뽑아 버리는 엄마가 콧줄을 가만히 둘 리가 없을 것 같았지만 일단 시도해 보기로 했다. 며칠 지나고 나서 방문객이 몰릴 연휴를 피해서 면회를 다녀올 생각이었다.
설 다음날 저녁에 요양원에서 또 연락이 왔다. 원장과 통화했다. 엄마가 낮에 열이 올라서 해열제를 드리고 얼음팩을 썼더니 열이 떨어졌는데 저녁에는 기운이 하나도 없는 모습이 심상치 않다고, 나더러 급히 다녀가라고 했다. 너무 갑작스러운 악화 소식이었다. 바로 외투를 걸치고 집을 나서 요양원으로 갔다.
이 요양원에 입소한 건 1년 반 전이었지만, 코로나 때문에 엄마가 지내는 방에는 이날 처음 들어가 봤다. 산소 포화도가 70까지 떨어져서 원장은 산소마스크를 끼워 드리려고 하던 중이었다. 엄마는 의식이 없는 건지 불러도 반응이 없었다. 눈을 꼭 감은 채 숨을 힘겹게 쉬었다. 가슴이 크게 들썩였고, 혀가 말려 올라갔고, 손이 퉁퉁 부어 있었다. 원장님은 보통 이런 경우엔 응급실에 가야 할 테지만 병원에서 해 줄 수 있는 건 사실상 없을 거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난 1년 반 동안 여러 번의 수술과 입원 그리고 회복 과정 등 엄마가 거쳐온 길을 잘 알고 하시는 말씀이었다. 큰 병원으로 가는 순간 면회도 안 될 것이었다. 나도 엄마가 낯선 병원에서 처음 보는 의료진에 둘러싸여 온갖 검사를 받게 하고 싶지 않았다. 혹시 내가 자리를 지키지 못할 때는 이미 익숙해진 공간에서 그동안 돌봐주신 요양보호사나 원장님이 곁에 있는 편이 엄마를 위해 나을 거라고 판단해서 응급실로 모시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어려운 결정이었다.
방에 잠시 머물렀다. 엄마 손을 잡고 인사했다. “엄마, 고마워. 나를 낳고 키워 줘서 고맙고, 아들과 큰딸을 차례로 잃고도 힘겨운 상황을 꿋꿋이 잘 견뎌 줘서 고마워. 엄마, 사랑해.” 다시 오겠다고 인사한 후 엄마 귀에 대고 사랑하고 고맙다는 말을 한 번 더 했다. 엄마는 여전히 가쁜 숨을 쉬었고 눈을 뜨지 않았다.
엄마가 깨어나길 기다려 보는 수밖에 없었다. 불안과 걱정이 들끓었지만 희미해지는 이성을 붙잡고 그게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돌아오는 길은 그날 시작된 혹독한 추위 때문에 더욱 스산했다. 최고로 추운 날이 아닌, 좀 따뜻한 봄날에 가셨으면 좋겠다고 부질없는 생각도 했다.
다음날에는 산소를 구해야 했다. 매일 산소 한 통이 필요한데 휴일이라 업체에서 공급받을 수가 없었다. 원장님은 큰 요양원에 수소문해서 비상용 산소통을 빌렸다. 늦은 오후에 다시 원장과 통화했을 때, 엄마가 눈을 한 번 떴다고 들었다. 나는 “아, 네.”라고만 대답했다. 또 하룻밤을 보내고 원장 전화를 받았다. 엄마가 좀 더 좋아지셨다고, 영접기도에 대답도 했다고 하셨다.
오후에 엄마를 보러 갔다. 엄마는 막 산소마스크를 벗고도 산소포화도를 정상으로 유지했다. 대신 가래가 끓어서 더 힘겨워 보였다. 베개가 축축할 정도로 땀을 흘린 상태였다. 내가 얼굴을 들이밀고 딸 알아보겠느냐고 물었더니 엄마는 알아보는 시늉을 했다. 나중에 간호사가 나를 가리키며 누구냐고 묻자 모른다고 했지만 말이다. 아픈 데 없느냐고 물었더니 엄마는 늘 그랬듯이 “없다”라고 답했다. 옆에서 원장이 감탄했다. 대답하는 모습이 너무 예쁘다고. 떠나는 줄 알았던 엄마가 돌아오셨으니 감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와 똑같은 마음을 원장님 얼굴에서 읽었다.
간호사가 한 차례 석션을 해드렸다. 괴로운 과정이었다. 목과 코에 가는 관을 넣어 가래를 뺐다. 엄마는 마우스피스를 꽉 물고 저항했다. 나까지 세 명이 붙어서 엄마를 달랬다. 간호사가 두 번째로 코에 관을 넣으려던 순간, 엄마가 고개를 저으며 외쳤다. “코에 그런 거 넣고 그러시면 안 됩니다!”
그 힘든 상황에 나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우리 엄마 맞네! ‘하지 마!’ 혹은 ‘안 돼!’도 아니고 ‘안 됩니다!’라고 말하는 엄마.
엄마는 힘든 와중에도 의사 표현을 확실히 했다. 기침 후 가래를 뱉게 하려고 휴지를 대면 ‘없다’라고 말할 때도 있었다. 추울까 싶어 이불을 덮어줄까 물으니 괜찮다고 대답했다.
내가 일어나 나오려고 인사를 했더니 엄마가 뭐라고 웅얼거렸다. 언젠가부터 엄마 말을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턱의 움직임도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가지 말라는 거냐고 되물었더니 엄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가 나를 붙잡은 것은 지금껏 처음이었다. 10년 가까이 병원과 요양원에 계시면서 나더러 빨리 가라고 한 적은 있어도 더 있으라고 한 적은 없었으니까. 나는 더 앉아 있다가 1시간을 채우고 일어났다. 원래 면회가 허락되지 않는 공간인데 너무 오래 머문 것 같았다. 이런 사실을 설명했더니 엄마도 내가 떠나는 데 동의했다.
엄마는 이렇게 고비를 넘겼고 동시에 나를 준비시켰다. 요양원에서 임종을 맞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원장님과 미리 상의했다. 집에서 돌아가실 경우 경찰이 출동하겠지만 요양원에서 노환으로 돌아가시는 경우는 보통 괜찮다고 하셨다. 최근에 가족의 선택으로 요양원에서 돌아가신 어르신 한 분이 계셨는데 편안하게 떠나셨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병원이 아닌 곳에서 사망한 경우, 사망진단서가 아니라 사체검안서를 발급받게 된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조금 낯선 선택이기는 했다, 그래도 엄마의 임종 장소로 병원이 아닌 요양원에 우선순위를 두는 쪽으로 내 마음이 기울었다. 마지막 순간이 어떻게 닥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니까 잠정적 결정이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