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거품과 각자도생의 청구서
새로운 갤럭시 스마트폰이 출시될 때마다 커뮤니티는 똑같은 논쟁으로 시끄럽다. "이번엔 스냅드래곤인가, 엑시노스인가?"
소비자들은 퀄컴(Qualcomm)의 '스냅드래곤'을 원한다. 삼성의 자체 칩인 '엑시노스'가 탑재된다는 루머만 돌면 "성능도 떨어지고 뜨거워진다"며 출시 전부터 원성이 자자하다. 심지어 주주들조차 "돈만 까먹는 시스템LSI 사업부를 접고 메모리에나 집중하라"고 아우성이다.
하지만 삼성 경영진은 요지부동이다. 욕을 먹든, 조롱을 당하든 엑시노스 개발을 절대 멈추지 않는다. 도대체 왜일까? 삼성이 소비자 마음을 모르는 바보라서 이 적자 사업을 끌고 가는 것일까?
아니, 정반대다. 그들은 '퀄컴이라는 제국'의 무자비함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모바일 생태계에서 퀄컴은 단순한 부품 공급사가 아니다. '통행세'를 걷는 징수원이다.
스마트폰의 두뇌인 AP(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 시장에서 퀄컴의 독점력은 절대적이다. 그들은 칩 가격을 매년 큰 폭으로 인상하는 것도 모자라, 스마트폰 제조사들에게 휴대폰 판매 가격의 일정 비율을 특허 사용료로 떼어간다. "우리 칩을 쓰고 싶으면 폰을 팔 때마다 세금을 내라"는 식이다.
만약 삼성에게 엑시노스라는 자체 대안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퀄컴은 부르는 게 값이 될 것이다. 칩 가격을 2배로 올려도, 로열티를 50% 인상해도 삼성은 거부할 명분도, 힘도 없다. 이것이 바로 '기술 종속'의 공포다.
엑시노스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퀄컴은 삼성의 눈치를 보며 가격 협상 테이블에 앉아야 한다. 즉, 엑시노스는 성능이 조금 부족할지언정, 삼성전자의 영업이익을 지키는 '가장 강력한 협상 카드(Leverage)'다.
우리는 흔히 '1등 제품'만 살아남는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비즈니스 세계에서는 '존재하는 2등'이 1등의 폭주를 막는 안전장치 역할을 한다.
최근 엑시노스 2600(가칭)을 둘러싼 일련의 흐름은 이 '2등의 전략'이 얼마나 치열한지를 보여준다. 삼성은 "수율이 낮아도 갤럭시에 엑시노스를 넣을 수 있다"는 시그널을 끊임없이 시장에 보낸다. 이는 퀄컴에게 보내는 무언의 경고장이다. "너희가 너무 비싸게 굴면, 우리 칩으로 갈아타버리겠다"는 압박이다.
유럽 시장 또한 삼성을 키워주는 중요한 우군이다. 퀄컴의 독주를 경계하는 유럽 통신사들은 대안으로 엑시노스를 채택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이는 삼성이 엑시노스를 통해 '탈(脫) 퀄컴 연대'를 구축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엑시노스의 눈물겨운 생존기는 단순한 고집이 아니다. 자체 설계 능력을 잃어버리는 순간, 삼성은 퀄컴과 구글이 시키는 대로 폰을 찍어내는 단순 하청 공장으로 전락할 것임을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소비자 입장에서 당장 내 폰에 성능 좋은 스냅드래곤이 들어가는 게 좋을 수 있다. 하지만 거시적으로 보면 엑시노스의 죽음은 곧 '스마트폰 가격의 폭등'으로 돌아올 것이다.
경쟁자가 사라진 독점 기업은 반드시 가격을 올린다. 엑시노스가 버텨줘야 스냅드래곤 가격이 통제되고, 그래야 갤럭시 가격도 방어된다. 이것은 시장의 냉혹한 원리다. 삼성은 지금도 칩 설계의 핵심 자산(IP)을 외부(Arm 등)에 의존하며 막대한 라이선스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 자체 설계 역량을 키워 이 비용마저 내재화하는 것이 그들의 최종 목표다.
엑시노스는 화려하지 않다. 때로는 버벅거리고 뜨거워진다. 하지만 그것은 거대 독점 자본에 맞서 유일하게 'No'라고 말할 수 있는 '독립군의 무기'다. 우리가 엑시노스를 비웃을 수는 있어도, 그 존재 가치까지 부정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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