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거품과 각자도생의 청구서
전쟁터에서 가장 무서운 전략은 무엇일까? 적진 한복판에 핵폭탄을 떨어뜨리는 것? 아니다. 적군의 식수와 보급로를 조용히 끊어버리는 것이다. 굶주린 군대 앞에서는 최첨단 미사일도 고철 덩어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지금 반도체 전쟁의 판도가 딱 이 모양새다. 미국과 서방 세계가 AI 칩이라는 '핵무기' 개발에 혈안이 되어 있는 동안, 중국은 전 세계의 '식량 창고'를 접수해 버렸다.
최근 중국 최대 파운드리 업체인 SMIC의 CEO 자오 하이진은 의미심장한 경고를 던졌다. "메모리 부족으로 인해 고객들이 다른 칩 주문까지 줄이고 있다." 이 발언의 행간을 읽어야 한다. 이는 반도체 생태계가 얼마나 긴밀하게 얽혀 있는지를 보여주는 협박성 예고편이다.
우리가 흔히 '레거시(Legacy) 칩'이라 부르는 28나노 이상의 구형 반도체는 겉보기엔 하찮아 보인다. 하지만 이것들은 자동차의 브레이크를 제어하고, 냉장고의 온도를 조절하며, 미사일의 탄두를 날려 보내는 '산업의 쌀'이다.
중국은 서방의 제재로 첨단 장비(EUV) 반입이 막히자, 전략을 180도 수정했다. 막대한 정부 보조금을 쏟아부어 전 세계 레거시 칩 시장을 덤핑(Dumping) 수준의 가격으로 장악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가격 경쟁력을 잃은 서방의 레거시 공장들은 고사 위기에 몰렸다.
이것은 단순한 시장 진입이 아니다. 경쟁자를 말려 죽인 뒤, 전 세계 공급망의 목덜미를 쥐겠다는 '초크포인트(Choke-point)' 전략이다.
서방은 오판했다. 엔비디아의 H100 GPU가 '다이아몬드'라면, 중국이 장악한 MCU(마이크로 컨트롤러)와 PMIC(전력 반도체)는 '산소'다. 다이아몬드가 없어도 사는 데는 지장이 없지만, 산소가 없으면 즉사한다.
이 불균형은 공포스럽다. 아무리 엔비디아가 슈퍼 AI 칩을 만들어도, 전원을 켜주는 500원짜리 전력 칩(PMIC)이 없으면 그 서버는 켜지지 않는다. 중국은 정확히 이 지점을 노렸다.
만약 대만 해협에 위기가 닥치고 중국이 레거시 칩 수출을 통제한다고 상상해 보라. 미국의 AI 데이터센터는 돌아갈지 몰라도, 포드(Ford)의 자동차 공장과 보잉(Boeing)의 생산 라인, 심지어 미군의 무기 생산까지 올스톱된다.
2021년 차량용 반도체 대란은 예고편에 불과했다. 중국은 이제 공급망의 '필수재'를 독점함으로써, 언제든지 서방의 숨통을 조일 수 있는 '우아한 깡패(Elegant Gangster)'가 되었다. 그들은 총 한 방 쏘지 않고도 전 세계 인플레이션을 유발하고 제조업을 마비시킬 방아쇠를 손에 쥐었다.
이 거대한 포위망을 뚫을 해법은 무엇인가? 결국 다시 '공급망 다변화'와 '종합 반도체 기업(IDM)'의 가치로 귀결된다.
서방 세계가 중국산 레거시 칩에 의존하지 않으려면,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가 필요하다. 여기서 삼성전자의 포지션이 다시 한번 빛난다. 삼성은 최첨단 3나노 공정뿐만 아니라, 탄탄한 레거시 공정 라인업을 보유하고 있다. 메모리와 파운드리를 모두 가진 삼성은 중국의 '인질극'에 대항하여 서방 기업들에게 '안전한 피난처'를 제공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대안이다.
우리는 3나노 전쟁만 보며 환호하지만, 진짜 전쟁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누가 더 많은 산소통(레거시 칩)을 확보하느냐'로 치러지고 있다. 화려한 기술 뒤에 숨겨진 이 투박한 칩들의 전쟁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언젠가 중국이 발행할 '안보 청구서'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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