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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우 Oct 15. 2023

D-DAY

나는 웹디자이너'였'다

 

"팀장님, 잠시 얘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2년 7개월 만이었다. 팀장님께 처음이자 마지막 면담 신청을 하게 된 것은.

그래, 마지막이다. 이 날 나는 회사에 퇴직서를 내기로 마음먹었으니까!


그렇게 나는 27살 봄, 첫 회사를 나오게 되었다.



*



 나의 걱정이 무색하게 퇴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팀장님께 말씀드리고, 팀장님은 이사님께 말씀드리고. 퇴직서를 작성하고, 자료 백업을 하고. 함께했던 이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며 인사를 건네니 모든 것이 끝났다.

누구든 나를 잡지 않을까? 그러면 연봉을 더 높이 불러볼까? 이런 상상은 정말 상상으로 끝이 났다. 축하하면 축하했지 아무도 잡지 않았다. 하긴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거다. 이 회사에서 일반 사원이란 언제든 교체할 수 있는 작은 기계 부품이니 최대한 빨리 도망가!



회사를 정말 부정적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내게도 나름대로 원대한 계획이 있었다. 부족한 나를 뽑아준 이 회사에서 열심히 일해서 직급을 달아보자! 그 이후 천천히 외주를 받으며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성장하자! 그렇다. 웹디자인 업무가 적성에 맞고 동료들은 친절했으며 워라밸이 확실히 지켜지는 회사에 나는 조금이라도 뼈를 묻어볼 생각이 있었다. 퇴사를 마음먹기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욕하면서도 애정이 있는 그런 곳이었다.

 그런 마음이 휙 돌아서게 된 것은 팀이 두 번째 옮겨지면서부터였다. 그것도 당일통보로. 팀과 트러블이 있거나 업무 실력의 문제가 있던 것은 아니고 팀 적응력과 빠른 성장을 보여서 추천이 있었다고 한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팀이 옮겨지니 칭찬에 기쁘기보단 의구심이 들었다. 그렇게 내가 옮겨진 팀은 이전 업무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 창설된 팀이었다.

 추천의 이유가 진짜였든 아니었든 새 창설 팀에서도 나름 열심히 했다. 이전 히스토리가 없는 백지상태의 업무를 이제 막 창설된 팀이 담당하다보니 전체적으로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웠으나 다같이 으쌰으쌰 힘을 내며 일에 적응하고자 노력했다. 그런데 와버린 거다. 수많은 업무와 이에 맞지 않는 연봉, 그로 인한 깊은 현타가...



 새 팀으로 옮겨지고 퇴사를 마음먹기까지는 딱 한 달이 걸렸다. 가장 큰 이유를 꼽자면 업무량이었다. 당시의 일기장에 제일 많이 써져 있던 말은 딱 두 가지이다. '진짜 너무 힘들고 피곤하다.', '퇴사'

매일이 지옥 같았다. 커피를 마시거나 화장실을 가며 숨 쉴 틈조차 없이 일을 해도 야근은 필수였다. 하필 집과 회사 거리도 있다 보니 4시간 자고 일어나 커피를 구겨 넣는 게 일상이 되었다. 그중 제일 끔찍했던 경험은 불금 연차를 쓰고 놀고 있을 때 급하게 온 연락이었다. 팀장님도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며 사과와 함께 꺼낸 말은 주말 출근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몸이 고장 나는 게 느껴졌다. 팀원들이 하나둘 점심시간을 이용해 병원을 가고 나는 두통과 불면증에 시달렸다. 돈이라도 많이 줬으면 몰라. 언제 쓸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기약 없는 포상휴가는 왜 주는데?

매일같이 동료들과 퇴사 후 삶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고 난 결심하게 된다. 어딜 가든 여기보단 나을 거다! 여기서 기약 없이 질질 끌어봤자 연봉은 쥐똥만큼 오르고 내 청춘은 사라질 거다. 그러다가 고장 난 기계 부품이 되면 소리소문 없이 교체되는거지. 그렇다면 먼저 기계에서 툭 떨어져 나오는 거야. 그리고...



타투이스트가 되자!



 지옥 같은 하루하루에 정신이 나가 현실적인 생각이 불가능해진 나는 정말 뜬금없이 이직도 아닌 직종 변경을 꿈꾸게 되었다. 그것도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생소한 타투이스트라는 직종으로! 당시 나는 주변인들의 말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고 있었고, 영혼 없는 칭찬을 판별할 능력이 없었으며, 이로 인해 출처 모를 자신감으로 가득차 있었다. 왜 타투이스트였는지는 다음 편에서 이야기해보겠다. 물론 정말 별 거 없다.

어차피 인생은 어떻게든 흘러가게 되어있고 어느 분야든 노력에 따라 평균은 할 수 있을 거다. 웹디자인도 그랬잖아? 결과물을 못 내서 혼나던 열등생 디자이너에서 어느새 에이스로 불리고 있는 내 노력을 믿자.



결심이 서니 얼른 회사에 가고 싶어졌다. 세상에 이런 날도 오는구나! 지하철을 타고 출근을 하는 내내 시뮬레이션을 돌렸더니 팀장님께 메신저를 보내는 것이 그렇게까지 긴장되지 않았다.


 "팀장님, 잠시 얘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뭐야, 생각보다 별 거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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