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할 수 있는 사람은 많을수록 좋다
“갑자기 운전면허를 딴 이유가 뭐야?”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물음에 나는 잠시 고민하였다.
분명히 처음에는 운전을 할 생각이 없었다. 대중교통은 너무나도 잘 되어있고, 자동차 사고는 무서웠으니까…
“우리 집에서 운전할 수 있는 사람이 아빠밖에 없어. “
말을 꺼내고 보니 운전을 결심했던 이유가 조금은 정리되는 것 같았다.
“근데 문득 겁이 나더라고. 만약에 아빠가 갑자기 쓰러지면 어떡하지? “
시간이 흐를수록 분명해지는 사실이 있다.
부모님의 시간은 나의 시간보다 훨씬 더 빠르게 흐른다는 것.
강하고 든든했던 아빠가 아플 때마다, 나는 애써 외면하던 이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밤의 고속도로를 달리는 시간이 정말 좋다.
엄마와 아빠가 조용히 나누는 대화와 창 밖을 스치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스르르 잠이 드는 시간이 영원하길 바란다.
그러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 순간이 언젠가는 사라진다는 사실에 문득 슬퍼진다.
몇 번의 시간이 더 지나고 나면 운전석에 앉아있는 건 내가 되겠지. 그리고 뒷좌석에는 부모님이 앉아있을 거야.
시간과 함께 바뀌어갈 자리를 생각하면 씁쓸해지다가도 멈출 수 없이 흘러가는 이 순간들이 더욱 소중해진다.
몇 달 전, 아빠가 크게 아픈 적이 있었다.
우리 집에 운전이 가능한 사람은 아빠 외에 없었기에 결국 택시를 타고 갈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을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아 나는 열심히 운전 연습을 하였다.
그리고 최근에 한번 더 아빠가 이유를 알 수 없는 고열에 시달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나는 운전이 가능했다.
힘들다며 병원에 가길 거부하던 아빠를 병원에 데려다주었을 때, 뿌듯함과 안도감을 나는 잊을 수 없다.
더 이상 위급상황에서 두려움과 불안에 떨며 있지 않아도 되는구나. 내가 나서서 행동할 수 있는 수단이 생겼구나.
아무래도 주 운전자가 아빠였다 보니 운전 관련 에피소드는 아빠와 관련이 깊다.
아빠는 직업부터가 운전과 관련되어 있는 중장비 기사인데 직업 특성상, 한 장소에서 며칠에 걸쳐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아예 인근에 숙소를 잡고 일하거나, 중장비를 주차해 두고 대중교통을 타고 이동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내가 운전이 가능해진 거다!
기다렸다는 듯이 아빠는 내 실력이 쌓였다 싶을 때 픽업을 부탁하였다. (친구와 약속 중에 오라고 한 건 약간 마이너스~)
처음으로 가보는 지역이라 조금은 헤맸지만… 문제없이 아빠 데려오기 성공! 그다음 날도 책임지고 아빠의 출근을 도왔다. (이른 아침 출발도 약간 마이너스~)
아빠는 중장비를 주차해 놓고 누군가가 픽업하러 오는 것이 소원이었다고 한다. 나는 그냥 운전이 재미있어서 하는 건데 아빠의 흔치 않은 감사 표현에 괜히 찡해졌다.
사실 면허를 딸 때부터 칭찬을 바라며 했던 말들이 있다.
“딸내미 백수라서 시간도 남아도는데 엄마, 아빠 출퇴근길을 책임질게~“
반쯤은 농담이었고 출근길 차들이 무서워 미루고 또 미루는 중이었는데 생각보다 별 거 없었다.
방어 운전을 하며 신호만 잘 지키며 가면 될 일. 나도 재미있고 부모님도 편하니 앞으로도 종종 픽업해 드려야겠다.
운전이 필요하다고 느낀 것은 가족 때문만이 아니었다.
몇 년 전, 외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며 깨달았다.
이별이란 정말 예고 없이 찾아온다는 것을.
결혼식은 미리 일정이 정해지고 낮에 진행하다 보니 갈 수 있는 방법이 많다.
하지만 장례식은 그렇지 않다. 죽음은 시간을 가리지 않고 찾아온다. 새벽이든, 한밤 중이든.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서라면, 이별에 상심한 그들을 위해 먼 거리라도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늦은 밤까지 그들의 곁에서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이별의 상실감이 얼마나 큰지 알기에, 이러한 상황에서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알기에.
언제든, 어디든 달려가기 위해서는 개인 이동수단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든 순간이었다.
그래서 운전을 할 수 있고, 운전할 차가 있는 지금이 나는 행복하다.
타인에게 기대지 않아도 시간과 관계없이 이동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
장소와 관계없이 타인에게 도움을 줄 방법이 있어서 행복하다.
초보 운전이기에 더욱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운전면허는 꼭 따고 여건이 된다면 운전하세요!”
운전은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다.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고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