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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문: [이사]를 읽고

지루한 날에 도사린 공포

by 길고영


오늘 하루도 평소처럼 무료하게 보냈다.

집에 돌아와 김영하 작가의 단편소설 [이사]를 펼쳤다.

스릴러 영화나 귀신의 집에서나 느낄 법한 공포를,

마주칠 줄은 몰라서 정신이 조금 혼미해졌다.


소설은 처음부터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게 만들었다.

신혼 초 장만한 17평 아파트에서 34평 아파트로 이사하는 부부의 하루는,

정말 무사히 끝날 수 있을까?


[이사]를 읽다 문득 떠오른 영화가 있다.

프랑스 영화 [풀타임].

출퇴근 지옥, 대중교통 파업, 육아와 생계를 책임지던 싱글맘 줄리.

그녀가 평범한 ‘내일’을 지켜내기 위해 벌이는 초 단위의 전투.


[이사] 속 부부도 그랬다.
턴테이블 위로 블루스를 틀고,
1,500년 된 가야토기를 들이며
작은 집에 천천히 삶을 채워왔다.
그 모든 시간을 품은 집을, 이제 떠난다.

하지만, 하필이면
엘리베이터는 고장 났고
황사가 몰아쳤다.
인부는 무례했고, 고객센터는 닿지 않았다.
손 없는 날이란 말 그대로
어느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는 날이 되었다.
남편은 가야토기를 깜빡했고,
간밤에 본 귀신을 닮은 이가 인부로 왔다.
잔금은 오늘 지불해야 하고,
그들은 돈을 받고 떠나면 다시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다.

나의 이삿날도 그랬다.
내 지난 세월이 담긴 짐 위로
계약서 한 장 들고 신발을 신고 들어온 사람들.
“추가요금이 생길 수도 있어요.”
그 순간, 집은 이미 낯선 손에 넘어가 있었다.

[이사]는 나의 경험을 다시 불러냈고,
장면 너머의 공포를 깨닫게 했다.
별다를 것 없는 내일을 지키기 위해,
오늘은 또 어떤 전투가 기다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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